엄격한 고위 공무원을 아버지로 뒀고,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30년 가까이 자금 업무만 했던 사나이가 있다면,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나 따분하고 딱딱할까.

게다가 무뚝뚝한 경상도 출신이며,외모마저 분위기를 잔뜩 잡아야 제격일 것처럼 아주 핸섬하게 생겼다면? 하지만 세상에 예외는 있는 법이다.

남상태 대우조선해양 사장이 그랬다.

만나자마자 그에 대한 선입견은 눈 녹듯 사라졌다.

건네오는 얘기는 정감 있고 격의가 없었으며,곳곳에 유머도 배어 있었다.

오래 알고 지낸 고향 형이나 막내 삼촌을 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지난 9일 저녁 서울 무교동의 한 중국집에서 한국경제신문 산업부기자와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수습기자들이 남 사장을 만났다.

저녁 10시쯤엔 인근 포장마차로 자리를 옮겨 2차도 가졌다.

오후 7시에 시작된 만남은 결국 새벽 1시에 이르러 끝났다.


#자금쟁이는 임전무퇴

-(화제는 그의 외모부터 시작됐다.)독자들이 지금까지 나온 CEO 중 가장 미남이라고 평가하실 것 같아요.

학교 다니실 때 여학생에게 인기가 많으셨겠네요.


"인기가 있기는 있었는데…(좌중 웃음) 하지만 너무 (여자 친구가) 많다 보니 실속이 하나도 없었죠.올해 스물아홉 먹은 우리 딸이 꼭 그래요.

부전여전 같아.하지만 내가 그래요.

남자 친구 많아봐야 아무 의미 없다.

한 남자라도 제대로 사귀는 게 낫다고요."

-술은 잘 하십니까.

"잘 못해요.

소주 1병 정도 합니다.

(얼마 후 식당 직원이 맥주를 가져오자 그는 맥주 상표부터 챙겼다.) 하이트맥주 사장이 제 친구인데,다른 상표 맥주 먹으면 친구한테 맞아죽어요.(웃음)"

-CEO(최고경영자)가 되시기 전 회사 생활은 어땠습니까.

회사 생활의 대부분을 자금 분야에서 하신 걸로 들었습니다.


"돈 구하느라 늘 바빴던 기억밖에 없어요.

옛날 대우조선은 자금사정이 좋은 날이 별로 없었어요.

1980년대까지는 하도 바빠 밤 10시 전에는 저녁 먹을 생각도 못했고.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쯤에는 돈 가방 들고 시위대로 오인돼서 경찰서에 붙잡혀 간 적도 많아요.

서울 명동에 갔다가 전경들이 못 나오게 해 100억원짜리 어음 보여주고 빠져 나온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죠.(남 사장은 이 대목에서 맥주에 고량주를 섞은 폭탄주 한 잔씩을 권했다.

그리고는 "사진기자 양반,사진 빨리 찍어둬요.

좀 있으면 얼굴 빨개져요"라는 농담도 했다.)

-휴가도 잘 못가셨겠네요.

"예.대우 들어와서 10년간 휴가 한번 못 썼어요.

입사 후 11년 만인 1990년에 가족들이랑 양평으로 첫 여름휴가를 갔어요.

근데 휴가 첫날 아침에 콘도에서 회사로 출근했다는 거 아닙니까.

자금이 하도 불안해 안되겠더라고.그날 (어음)교환 다 막고 밤에 콘도로 돌아가는데,팔당댐이 막혀버린 거야.그땐 밤 12시가 되면 댐을 잠갔거든.그래서 댐 지키던 사람들한테 수박 두 통 사가지고 '이 문 안 열어주면 나 마누라한테 쫓겨난다.

정말 큰일난다'고 읍소해 간신히 넘어갔죠.확실히 돈 만지는 사람은 임전무퇴야.그래서 자금직원들을 '자금쟁이'라고 해요."

-그렇게 힘들면 솔직히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겠네요.

"회사 나갈 생각도 많이 했죠.근데 (너무 바빠)다른 직장 원서 낼 시간이 있어야지.그러다 결국은 내 꿈이 뭔지도 잊어 먹고 살았지.요즘 보면 사람들 불평도 많고 그러는데,다 배부르니까 하는 소리야.배고프면 불평할 시간도 없어져요."

-그렇게 바쁘게 사셨으면,지금 부인과 자제분들에게 미안하진 않으세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경상도 사람들이라는게…미안해도 미안하다 소리 못하고,예뻐도 예쁘단 소리 못하고.지금 아내보고 결혼하자는 소리도 안 하고 결혼한 유일한 남자라고.난 프러포즈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어요."

# 아! 아버지….

-아까 경상도라고 하셨는데 고향은 어디세요.

"원래 대구예요.

나기를 대구에서 났죠.하지만 아버지가 공무원(고등고시 4회)이라 아버지를 좇아 청송 영양 예천 문경 의성 전주 대전 부산 안 살아본 데가 없어요.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서울로 오셔서 전학을 왔죠.아버지가 학교 결석처리 안 되려면 개천절 날 전학해야 한다고 해서 1962년 10월3일 경북사대부속중학교에서 경동중학교로 전학했어요."

-전학을 자주 다니면 어린 나이에 힘들지 않습니까.

"학교 다닐 때는 좀 고달픈 적도 있어요.

대구만 해도 우리나라 3대 도신데,서울 오면 사투리를 쓰잖아요.

서울 친구들이 시골 촌놈아,시골 촌놈아 놀렸어요.

그때만 해도 문화적 차이도 좀 있었죠."

-유년시절이 경제적으로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겠네요.

"경제적으로 괜찮았죠.어렵게 성장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독립적으로 자랐죠.내가 어릴 때 개집에서 하룻밤을 잤던 일화를 들려주죠.초등학교 4학년 때 대구에서 하숙을 했어요.

1959년인데 그 해 뇌염이 심하게 돌아 학교가 휴교를 했죠.당시 아버지가 의성군수였는데,대구에서 무작정 기차를 탔고 밤에 의성에 내려 집에 찾아갔어요.

어머니는 무척 반가워하셨는데,아버지가 딱 와서 '사내녀석이,옛날 같으면 가정을 책임질 나인데 부모 보고 싶다고 갑자기 오면 어떡하느냐'며 밤에 돌아가라는 거예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인데…나중에 어머니가 그러시는데 내가 그날 밤 집에 기르던 개집 속에 들어가 잤대요.

아버지는 저희에게 그렇게 독립심을 키워준거죠."

-아버지가 굉장히 엄하셨나 봅니다.

"예전의 아버지들이 다 그랬죠.엄하긴 엄했죠."

-그럼 사춘기 때 반항도 많이 했겠네요.

"워낙 무서우니까 반항도 못했죠.아예 게임이 안되는 거예요.

나는 대학도 재수를 했고,학교다닐 때 아버지가 피우지 말라던 담배도 피우고,음악을 좋아해 맨날 기타 치면서 집에 있었어요.

(그는 잠시 이야기를 멈춘 뒤 말을 이었다.) 우리 아버지,참 냉정하신 분입니다.

돌아가실 때 내 막내 동생이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동생에게 자신이 아프다는 걸 절대 알리지 말라는 거예요.

막내 동생은 아버지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었어요.

별수없이 내가 편지를 쓰게 됐지요 아버지가 연로하셔서 편지쓰기가 힘드시니까 내가 대신 쓴다고 핑계를 댔죠."

-(다소 무거워진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누군가 물었다.)다시 인생을 시작하면 월급쟁이를 하고 싶으세요.

"다시 할 수 있다면 예술을 하고 싶어.예술하는 사람은 언제나 부러워.다시 인생을 시작한다면 영화감독을 하고 싶어요.

창조성이 있잖아요.

계백 장군 같은 영화를 찍을 겁니다.

비장하게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결국 자기가 죽을 걸 알고도 끝내 할 일을 다하잖아요.

장수가 전쟁터에서 죽는 게 가장 명예스러운 거 아닌가요.

기업인들이 협상하다 죽는 것이 가장 명예스러운 일인 것처럼.나는 개인적으로 계백 장군을 존경해요."

-음악은 좋아하십니까.

"비틀스에서 브람스까지.알기는 엄청 알아요.

클래식 틀어주면 이건 누구 음악이다 바로 알죠.요즘도 극장 가서 영화보다 보면 저거는 백 뮤직이 뭐다,거의 알죠.LP,CD 합쳐 1000장 있어요.

어려서부터 음악판을 많이 갖고 있었는데,아버지가 공부 안 한다고 아궁이에 태워버린 것만 수백장이야.담배 한 갑이 15원인데 레코드판 한 장이 50원이던 시절이었죠.그래도 아궁이에 들어갔던 것들 중 몇 놈은 아직 살아남아 있어요."

(어느덧 중국집 회동은 3시간 넘게 시간이 흘러 있었다.

남 사장은 갑자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포장마차로 자리를 옮기자는 거였다.)

# 포장마차에서 다시 한잔

-(2차의 첫 질문은 다시 가벼워졌다) 만일 아주 뺀질뺀질한 사람이 사윗감으로 인사를 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로 낙제입니까.

"(잠시 생각한 후) 바로 낙제가 아니라…사람이 뺀질뺀질해야 할 때는 뺀질거려야 하고,바보 같을 때는 바보 같아야 하고,영리해야 할 때는 영리해야죠.다양성을 인정하는 게 글로벌 스탠더드 아니겠어요.

하지만 (사위 후보에게) 다음번에는 다른 모습을 보여 보라고 해 보겠어요.

근데 내가 된다 안 된다 하면 되겠어요? 지(딸)가 좋아해야죠."(웃음)

-평소 지론이라면 어떻게 있나요.

"사람을 중하게 여긴다는 거죠.저는 천성적으로 한 번 믿은 사람은 버리지 않아요.

지금까지 자금 업무를 오래 했지만 단 한 번도 시재(현금) 검사를 해본 적이 없어요.

믿는 사람을 쓰고,쓰고 나면 100% 믿죠.물론 일평생 한 명도 버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하지만 언젠가 나를 음해해서 검찰에 고발한 직원들이 있었는데,지금 그 중 3분의 2는 구제해 줬어요.

뭔가 나를 모함한 이유가 있었겠지,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떻게 판별하세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느낌이 와요.

눈빛만 봐도 다 알겠더라고요.

나는 경영이라는 게 과학이라기보다는 아트에 가깝다고 봐요.

필링이 중요하죠.저 사람은 괜찮다,저사람은 믿을 수 있겠다 감이 있다고요.

특히 (어려서) 불편하고 어려운 과정을 겪었던 사람은 더 믿을 수 있죠."

-대우조선해양 직원은 얼마나 됩니까.

그 중 얼마가 알짜 직원이라고 생각하세요.

"(머뭇거림 없이) 2만6080명입니다.

이 중 알짜는…(잠시 생각에 잠긴 뒤) 5%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5%가 끌고 95%가 따라가면 100%가 잘 살 수 있어요.

미 해병대 구호는 '원 포 올(one for all),올 포 원(all for one)'입니다.

의미 심장한 얘기죠.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면 되는데…."

-사장님은 전문경영인입니다.

오너와 전문경영인 체제의 장·단점은 뭐라고 보시나요.

"전문경영인 제도는 분명 장점이 있어요.

투명성이 있지요.

굉장히 객관적으로 하니까,노동조합도 우리를 믿고 따라와 줍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오너가 있는 곳보다 분명 강합니다.

반면 불리한 점도 있어요.

기회를 포착해야 하는데,주변에서 주인 없는 회사가 일만 벌인다고 해서 기회를 놓치는 게 정말 억울해요."

-사장의 업무 중 가장 쉬운 것과 어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제일 쉬운 것은 물리학적이고 아주 기계적인 거죠.공학적으로는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한 번 풀리면 나중에도 계속 풀립니다.

하지만 사람은 계속 바뀌죠.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잡는 게 가장 어렵습니다.

아직 원하는 만큼은 못 얻었지만,매년 조금씩 직원들 마음을 얻어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직원들에게 서운할 때도 있죠?

"진심을 몰라 줄 때 그렇죠.난 사랑하는 부하일수록 많이 야단을 쳐요.

잘 되라고 하는 말이지만 직원들은 야단맞는 게 싫어 표정이 일그러지고 그래요.

심하면 회사를 그만둔 직원도 있다니까요.

그러면 '내가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요즘엔 그 직원들도 다 연락이 와요.

'그때 정말 제대로 배웠습니다'라고 연락이 와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중압감이 심하실 텐데요.

이겨내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두 가지인데,하나는 눈 덮인 산에 올라가는 겁니다.

대한민국에 안 가본 산이 없습니다.

무척 빨리 올라 갑니다.

산에서는 10년 젊은 사람들에게도 절대 지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집에서 음악을 아주 크게 듣습니다.

협주곡 같은 것을 크게 틀어놓고 듣는데,30분 정도 지나면 마음이 좀 풀리죠.지하실에 음악실이 따로 있습니다.

내가 아파트에 못 살고 단독주택에 사는 게 이 때문입니다."

-음악실이 있는 지하실이 궁금하네요.

"거기에는 음악실 말고도 온갖 잡동사니가 다 있어요.

난 사람도 그렇지만 물건도 못 버려요.

학교 다닐 때 갔던 극장표도 다 있어요.

내가 어린 시절 아버지께 썼던 편지,아버지가 내게 보낸 편지도 있고.아버지 편지 중에는 내가 군대생활할 때 '담배는 너의 적이다'고 쓰셨던 구절이 제일 기억에 남네요.

끝끝내 담배를 피우긴 했지만요.

언젠가는 할머니 유품을 정리하다 아버지가 먼 옛날 할머니께 보낸 편지도 찾아냈죠.거기에서 아버지가 '식량배급은 나옵니다.

굳이 불편한 걸 말하자면 부엌이 없으니 비오는 날은 밥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끼 안 먹는다고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니니까 어머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쓰셨던 구절이 잊혀지질 않아요."

-학교 다닐 때 공부는 잘 하셨죠?

"내가 재미난 얘기를 하나 하죠.세상이 성적 순으로만 되지 않아요.

우리 고등학교 때는 우열반이 있었죠.열반은 '돌반'이죠.나도 돌반 출신이고.근데 지금 50대가 돼 동창들과 골프대회를 가끔 해요.

공부 잘했던 우반 출신은 골프 한 팀이 잘 구성이 안돼요.

반면 열반은 골퍼들이 워낙 많아 예선전을 거쳐야 할 정도예요.

열반 중에서도 만날 싸움만 하던 얘들이 모여 있던 '시카고반'(남 사장은 시카고가 마피아의 도시라는 데서 시카고반이 유래했다고 설명했다) 출신이 골퍼가 가장 많아요.

결국 인생이라는 게 공부 순서대로 되는 것은 아니고,사회 나와서 자기가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 (사회의) 우반에 속하고,열반에 들기도 하는 거죠."

-골프는 잘 치십니까.

"1992년도부터 배웠죠.골프 시작하고 11개월 만에 싱글 들어갔었죠.옛날 핸디는 12쯤 됐는데,지금은 22쯤은 놔야 할 걸요.

지난 1년은 골프 안 쳤어요.

회사 실적이 안 좋아서요.

임원들에게도 골프 금지령을 내렸어요.

그러나 올해 들어 골프 금지령을 다 풀었어요.

올해 이익은 작년보다 5~6배 나올 것 같으니까요."

-이거 벌써 오전 1시가 돼 갑니다.

우리가 만난 지도 1박2일이 됐네요.

정말 오늘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이상열 기자 mustafa@hankyung.com
사진=김병언 기자 misa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