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濟民 < 연세대 교수·경제학 >

바야흐로 '진보파의 위기'가 도래하는가. 대선(大選)이 있는 올해 한국의 진보파는 아무래도 큰 어려움을 겪을 것 같다. 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러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이 결집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라는 추측도 있지만,과거에 비해 진보파의 입지가 크게 위축된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진보파의 아성(牙城)이라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

한국의 진보파는 왜 곤경에 빠졌는가. '북한 인권' 같은 정치적 딜레마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근본적(根本的)인 이유는 역시 경제다. 단적으로 한국의 진보파는 대다수 국민에게 '먹고사는 문제' 즉 경제성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지 못한 것이다. 대학생이라도 졸업 후 일자리가 없다면 생각을 달리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진보'인가. 무엇보다 진보의 원래 의미를 따져볼 때 그런 의문이 안 들 수 없다. 진보라는 개념은 서구에서 18세기에 계몽사상과 함께 생겨난 것이다. 진보는 기존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환경에 대한 인간의 제어능력을 지속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그 경제적 표현은 단적으로 '산업화'다. 좀 더 단순화하면 경제성장이 진보였던 것이다.

18세기 계몽사상가였던 애덤 스미스는 당시의 대표적인 진보파 학자였다. 스미스는 당시의 기존 경제제도였던 중상주의적 국가 개입을 지양하고 자유방임적 시장경제를 구축함으로써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후 진보주의는 스미스식(式)에 머무르지 않았다. 19세기 들어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성립하자 그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드러났다. 자본주의는 경제성장에 있어서는 유례없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격심한 경기변동,극도로 불평등한 분배,개인의 이익과 사회적 이익이 괴리하는 등의 문제를 드러냈다. 그런 이유로 사회주의가 나오게 되었고,사회주의가 아니더라도 자본주의는 수정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 '진보'의 주 내용이 되었다.

그러나 구미(歐美)의 진보파는 자본주의의 문제점 해결을 강조했지만,성장을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19세기의 대표적 진보적 사상가였던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사람이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다소 희생할 수도 있다고 하였지만,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시 최선진국이었던 영국에 대한 이야기이고,다른 나라를 두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칼 마르크스 자신이 누구보다 성장을 강조하였다. 사회주의가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결국 생산력의 발전,즉 경제성장에 대해 질곡(桎梏)이 되기 때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20세기 들어 복지국가 도입을 선도한 대표적 진보파 경제학자 케인스도 성장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케인스는 정부가 개입함으로써 공황을 방지하고 지속적 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케인스 식 복지국가는 60년대까지 빠른 성장과 결부됨으로써 설득력을 가졌지만,70년대 이후 성장에 부담이 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90년대에 새로운 진보사상으로 등장한 '제3의 길'은 뭐니뭐니 해도 성장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복지국가를 내용으로 한다.

이렇게 본다면 경제성장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국의 진보파가 진짜 진보파인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주관적 의도야 어떻든 객관적으로 본다면 진보파가 아니라 '퇴보파' 아닌가. 권위주의와 부패의 유산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의 '보수파'가 진짜 보수파인지 의심스럽다는 것만으로 그런 문제를 가릴 수는 없다. 지금 대다수 국민에게는 민주화와 부패 척결에서 퇴보가 나타날 가능성보다 먹고 사는 문제에서 나타나고 있는 퇴보의 현실이 훨씬 더 큰 문제다. 한국의 '진보파'가 진정한 진보파가 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