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 거장 르네 마그리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장 벽면에 적힌 마그리트의 말에서 초현실의 예술세계를 상징적으로 느낄 수 있다. 작품은 그의 청년시대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생애에 따라 6개 전시실 10개의 테마로 구분해 배치됐다. 2,3층 전시실을 따라가다 보면 시기별 대표작 뿐만 아니라 그동안 접하기 어려웠던 1940년대의 인상주의.바슈시기 작품,무성영화,사진,판화,드로잉 등을 모두 볼 수 있다.

전시되는 작품 중 '순례자'는 마그리트가 말년에 도달했던 사고와 제작 기법을 가장 잘 보여준다. 단일한 구도에 다양한 모티프들을 결합했던 그의 초기 작품과 달리,후기 작품들에서 그는 단순함과 순수함에 도달한다. 이 단순함과 순수함은 그에게 단일한 생각에 초점을 맞추도록 해주었으며,따라서 관람객에게 더욱 강한 충격을 줄 수 있었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 나타난 중산모자를 쓴 인물의 얼굴이나 전신이 풍경이나 구름 낀 하늘로 대체되었다면,'순례자'는 그의 얼굴 자체가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교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마그리트의 초기 스타일에서 인물을 위한 배경으로 사용되었던 밤하늘은 '순례자'에서는 납작한 흑백의 화면을 배경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를 통해 모자를 쓴 남자의 이미지는 매우 실존적이며 시간을 초월했음을 강조한다.

'순례자'는 중산모자를 쓴 남자를 그린 마그리트 작품 중에서 얼굴이 분명하게 드러난 드문 예 중 하나다. 그러나 이는 마그리트가 개인적인 인간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얼굴이 정면으로 보이고 얼굴을 가리거나 감추는 물체는 없지만 그 얼굴은 특정 인물의 얼굴이라기보다는 비개인적이고 개성이 없는 '물체'이다. 게다가 얼굴은 옆에 있는 모습에 속하지 않고 양복과 모자로부터 벗어나 화면배경으로부터 떠 있다. 마그리트가 초기에는 감추어져 있는 것을 표현하는데 열중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대체된 것에 매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준기(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