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미국이 한국의 무역구제 개선 요구를 거부하면서 한국도 자동차 의약품 등 미국의 핵심 요구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맞불작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협상 시한이 내년 3월로 다가온 만큼 양국이 이 분야에서 끝까지 양보하지 않는다면 협상은 깨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다만 실낱같은 '빅딜'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

양국이 여전히 협상의 대전제인 'FTA를 타결해야 한다'는 데는 공감하고 있어서다.

특히 미측은 비공식 경로를 통해 한국이 무역구제에서 일부 요구를 수정하거나 새로운 요구를 내놓는다면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전달,협상의 '불씨'를 살려놓았다.



○미,민주당 의회에 밀린 '고육지책'

한국 협상단은 그동안 미국에 '무역구제 요구를 들어줄 경우 자동차와 의약품에서 양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미국측에 여러 차례 전달해왔다.

핵심 쟁점에서의 빅딜을 통해 협상의 물꼬를 트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국 돌아온 것은 미측의 '수용 거부' 통보였다.

이는 보호주의를 주장하는 민주당이 미 의회를 장악한 데다 쇠고기 뼛조각 문제 등으로 통상마찰까지 빚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 예측가능한 것이었다.

다만 미국은 '법령 개정이 필요한 한 현재 한국측이 하고 있는 요구는 최종협정문에 담길 수 없다'는 말로 협상의 여지는 남겼다.

즉 미국은 27일 밤 한국에 의회 보고서 내용을 통보하면서 '현재'라는 의미를 강조한 뒤 "법개정 사항이라도 새로운 문구나 제안에 대해서는 논의할 수 있다"고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협상단 관계자는 "미국이 '한·미 FTA 타결'이라는 대전제는 훼손하지 않으면서 무역구제법에 대한 자국 의회의 민감성을 고려하다 보니 고육지책으로 이런 양다리 전략을 들고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측이 무역구제 요구를 들어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향후 한·미 FTA 협정문에 반덤핑법 개정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길 경우 미 의회가 이번 보고서를 토대로 협정문을 거부할 가능성도 있다.

또 문구를 바꾸거나 요구를 수정할 경우 한국측이 기대한 무역구제 개선 효과가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특히 5가지 요구 중 기대 효과가 가장 큰 '국가별 비합산'은 반덤핑법 개정이 반드시 필요해 물건너갔다는 지적이다.


○한국 반발,"자동차 의약품 양보 없다"

한국은 미국이 무역구제 요구 수용을 거부함에 따라 자동차 의약품에서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정했다.

협상단 고위관계자는 "협상은 양측이 균형을 맞춰야 한다"며 "저쪽이 핵심 이슈를 제외한다면 우리도 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진동수 재정경제부 제2차관은 지난 11일 "무역구제 분야에서 우리측 요구사항이 어느 정도 진전이 있어야 자동차와 의약품 등 미국측 관심사항을 성의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협상단 내 운신의 폭도 크게 줄었다.

보건복지부 산업자원부 농림부 등 한·미 FTA로 권한이 축소되는 부처들의 반발을 추스르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미국이 무역구제를 내줬다면 '우리도 줘야 한다'고 양보를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현재로선 불가능하게 됐다.

특히 정부의 레임덕이 심해지고 있어 시간이 흐를수록 협상단 내부 사정도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앞으로 1월과 2월,두 번 남은 협상에서 양국이 핵심인 무역구제 자동차 의약품 등을 제쳐놓고 어떻게 협상의 물꼬를 틀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