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제대로 된 학춤을 춰야겠어. 완성을 봐야겠다. 니가 필요해. 니가 보여준 춤사위들이 필요해." "길동무는 조만간 내가 하게 될거야. 평생을 재주 겨루며 겯고틀던 지기(知己)가 이리 가고 없는데 내가 무슨 힘이 있어 명(命)을 더 이어붙이겠는가. 백무 이사람."

앞의 것은 일생 추구해온 춤의 완성을 위해 황진이에게 매달리는 스승 백무의 애원,뒤의 것은 친구이자 라이벌인 백무의 죽음 앞에서 눈물짓는 매향의 독백이다. 무릎 꿇은 스승에게 제자는 내뱉는다. "학춤 따윈 추고 싶지 않아. 나는 당신의 질기고 모진 그 끔찍한 집착이 싫어. 무섭고 진저리난다구."

KBS 2TV 수목드라마 '황진이'엔 이렇게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미거나 서늘하게 하는 대사가 나온다. 고구려사 중심의 대하극과 해외 촬영 위주의 트렌디극 사이에서 '황진이'가 주목받는데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배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화려한 한복과 매혹적인 춤사위 등 볼거리가 많다''주요 출연진의 카리스마가 돋보인다' 등.

'황진이'가 뜬 이유는 그러나 이런 외관적인데 그치는 것 같지 않다. 그보다 단순한 이야기를 긴장감있게 끌고가는 밀도있는 구성과 무게있는 대사가 이목을 사로잡는 것처럼 보인다. '겯고틀다'(지지 않으려 서로 버티어 겨루고 뒤틀다) 같은 흔치 않은 우리말 어휘를 만나는 것도 매력이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타고난 재주와 무서운 노력으로 장님기생 출신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극복,자유인으로 살고자 한다. 현대극에서 오히려 찾기 힘든 여성의 분명한 자아와 목표를 향한 의지와 집념,여성간 우정과 의리,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 제힘으로 뜻을 펼치려는 모습을 보여주는 셈이다.

'황진이'의 성공은 '왕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든든한 원작(김탁환 '나 황진이')에 힘입은 바 큰 듯하다. 인간 심리에 대한 천착과 폭넓은 인문학적 교양을 바탕으로 민족 초월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탄탄한 대본이야말로 21세기 경쟁력이라는 문화콘텐츠의 기본이자 한류 붐 지속의 관건이다.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