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茂進 < 경남대 교수·정치학 >

지난달 28~29일 베이징에서 북한과 미국 간 6자회담 수석대표 접촉이 있었다. 구체적인 합의 없이 종료됐으나 양측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고 밝혔다. 북한은 BDA(방코델타아시아) 은행 문제와 유엔안보리 대북(對北) 제재 결의안 해제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미국은 BDA 문제는 실무회의에서 논의하고 제재문제는 핵 프로그램 폐기와 연계돼 있기 때문에 제재를 벗어나려면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것 뿐이라고 응답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6자회담 재개시 북한이 취해야 할 조치와 이에 대한 미국의 상응조치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아직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현존하는 모든 핵무기와 핵 관련 프로그램의 폐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북한이 취해야 할 조치가 무엇인지는 일반적인 핵 폐기의 시퀀스(sequence)로 추론이 가능하다. 핵 폐기의 시퀀스는 '동결→신고→검증→폐기' 등 4단계로 이뤄져 있다. 초기 단계로 동결과 신고에 초점을 맞춰볼 때 영변 5MW 흑연감속로의 가동 중단과 동결,핵무기 실험 시설의 폐쇄,IAEA(국제원자력기구) 사찰관의 조기 복귀,핵물질의 이동금지 및 핵 시설과 핵물질의 자진 신고 등이 미국이 북한에 요구한 내용일 수 있다. 미국이 제시한 상응조치 내용은 9·19 북핵 공동성명의 내용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한국전쟁 종결 선언 등 체제안전보장,북·미관계 개선 및 정상화,경제적 측면에서는 에너지 및 인도적 지원과 경제협력 등이 북한에 제시한 내용일 것이다. 이에 북한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의 변화를 가늠할 수 있는 상징적인 조치가 선행돼야 하고,양국간의 상호 불신 제거와 신뢰회복을 위해 '행동 대 행동'의 단계적 동시행동 원칙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베이징 접촉에서 미국이 북한에 제안한 '조기수확(early harvest)' 구상은 과거에 비해 해결의지가 담긴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의 수석대표 힐 차관보가 많은 내용의 인센티브를 북측에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부시 대통령의 위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사실이라면 미국의 구상이 정책담당자의 수준이 아니라 부시 대통령의 해결의지가 담긴 '대통령의 구상'이라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의 구상이라면 이번 베이징 접촉은 힐과 김계관을 통한 부시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 간의 간접대화였던 셈이다.

미국의 조기수확 구상이 부시 대통령의 '결재'를 맡은 '부시의 구상'임을 힐 차관보가 김계관 부상(副相)에게 명시적으로 직접 언급했다면 김 부상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한국전쟁 종결 선언' 서명 용의까지만 해도 '수사'에 불과하다는 북한에 부시 대통령의 명시는 김정일 위원장도 놀라기에 충분하다. 끈질기게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의 변화를 주장해 온 북한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한 '변화의 상징성'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평양의 수뇌부들은 자신의 입장을 곧장 정리하지 못했고,김 부상도 평양에 들어가서 연구한 후에 답을 주겠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작금에 와서 미국은 북핵 해결의 수요가 있음은 틀림없다. 난관에 봉착한 이라크와 이란 핵문제,그리고 중간 선거의 패배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나 만약 북한이 미국의 수요를 '조급성'으로 이해해 곧장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면 대미 상황분석의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부시 구상의 상세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어느때보다도 대화를 통해 북핵문제를 해결하려는 미국의 진정성을 오판해서는 안된다.

북한은 한반도 비핵화라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遺訓)을 강조해 왔다. 유훈에도 불구하고 핵실험을 통한 핵무기를 보유한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이 부시의 구상에 대한 입장 표명을 지연시키거나 거부한다면 김일성 유훈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이제 북한이 핵 폐기에 대한 진정성을 보일 때다.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진정성이 담긴 '김정일 구상'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