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째 연하장을 디자인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지겹겠다'고 말해요. 연하장은 늘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연하장은 상당히 유행을 타는 카드입니다. 해마다 같은 카드를 보내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죠." 최은희 유사미(구 바른손카드) 디자인실장(37)은 국내 연하장 업계에서 'No. 1'으로 꼽히는 디자이너다.

1992년 바른손에 입사해 50만장이 넘게 팔리는 '초히트' 연하장을 두 개나 만들어낸 '히트 제조기'다.

하나의 연하장이 보통 12만~13만장 팔리는 현실을 감안하면 50만장은 놀라운 수치다.

지금까지 50만장이 넘게 팔린 연하장은 카드업계를 통틀어 단 3개 뿐이다.

최 실장의 작품이 아닌 다른 하나는 연하장이 지금보다 훨씬 호황을 누리던 1990년대 중반에 등장한 '금박 입힌 태산일출'이었다고 한다.

카드업계가 고리타분한 관성을 벗어 던지고 디자인 개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최 실장의 독주시대가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최 실장의 히트작품 생산 비법을 물어봤더니 엉뚱하게 '자식 타령'이 나온다.

"두 작품 모두 2000년 밀레니엄 연하장이에요.그 때 아이를 배고 있었거든요.두 사람 몫의 집중력 덕분인지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계속 쏟아져 나오더라구요."

당시 최 실장은 기존 연하장에서 금기시되던 푸른색을 바탕으로 '2000'이라는 숫자에 구멍을 뚫어 화려한 속지가 비치게 만들었다.

만들면서 '이건 된다'는 강한 자신감이 절로 배어나왔단다.

최 실장의 또다른 밀레니엄 히트작 '여의주를 두른 용'은 지하철을 타고 가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지하철 승객들이 어느 순간 몸통이 긴 용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아,이거다 싶었죠."

카드 인쇄 과정에서 커터기가 미처 다 떼어내지 못한 숫자 조각을 밤을 새워가며 일일이 떼어내다가 "이제 더 이상은 못하겠다"며 휴가를 내고 고향에 내려간 다음 날 아이가 나왔다.

해산 이틀 전까지 손에서 일을 놓지 못한 최 실장을 두고 인터뷰를 지켜보던 정우섭 유사미 영업본부장이 기어이 한마디 거들고 만다.

"최 실장은 전형적인 악바리예요. 자기 작품을 제치고 다른 작품을 채택한 기업이 있으면 어김없이 저에게 달려와요. 왜 안 한다고 하느냐,어떤 것을 원하더냐….그렇게 꼬치꼬치 캐묻고 나면 철야를 해서라도 다른 작품을 내놓고 말죠.카드 디자이너는 '감각'도 중요하지만 그런 '소비자 분석력'이 꼭 필요한데,최 실장은 그 점에서 단연 일등이에요."


실제로 최 실장은 본인이 자청해 매장 판매경험,영업 경험을 두루 겪어보기도 했다.

"디자이너는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고 영업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좋은 디자인이 나오질 않아요. 실제 영업을 해보니까 소비자 시각이 저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물론이고,보기좋은 것보다 좋은 의미나 단가·납품시기 등이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는 것까지 다양하게 배울 수 있었죠."

연하장이야말로 '계속 달라지지 않으면 금세 도태되는 분야'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과거에는 연하장이라면 십장생,일출,난,학,붓글씨 등 고전적인 문인화가 그려진 2단짜리 인쇄물만 떠올렸지만 지금은 달라요. 새로운 인쇄기술,새로운 소재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는 데다 해마다 유행 아이템이 극에서 극으로 바뀌고 있어요."

최 실장은 2003년 탤런트 김정은이 '부자되세요'라는 유행어를 퍼뜨리는 것을 보고 2004년도 연하장에 이를 곧바로 반영했다.

옛날 동전 2개와 전통 술을 달아 고전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직설적인' 메시지를 담은 이 카드는 당시 은행들이 앞을 다투어 주문하는 통에 물량을 대느라 힘이 들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단다.

그러나 다음 해 사정은 또 달랐다.

2005년 연하장의 트렌드는 '웰빙'이었다.

'건강하세요'라는 문구를 혁필화 느낌이 나는 세련된 타이포그래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돈의 위력과 건강의 중요성을 차례로 깨달아가는 과정이 연하장에도 고스란히 나타나는 셈이죠."

그에게 2007년도 연하장의 트렌드는 어떤 것이냐고 묻자 줄줄이 대답이 쏟아져 나온다.

"사회적 가치 자체가 크게 달라지지 않아 문구는 큰 변화가 없을 거예요. 대신 지난해와 달리 20~30대 젊은 층이 선호하는 세련되고 아기자기한 제품이 인기를 끌 겁니다. 과거에는 기업체 오너의 취향에 맞는 남성적이고 선이 굵은 제품이 인기였지만,앞으로는 연하장을 '저렴하게 즐기는 작은 미술품'으로 여기는 일반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춰 좀 더 여성스러운 제품이 대세를 이룰 것이라고 봅니다."

글=이상은 기자 selee@hankyung.com

사진=김정욱 기자 ha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