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元巖 < 홍익대 교수·경제학 >

우리나라의 작년 1인당 소득은 1만6000달러였으며,올해는 1만8000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내년 중 글로벌 달러화 약세로 원화 절상(切上) 추세가 지속된다면 내년 1인당 소득은 2만달러를 돌파할 수도 있다. 참여정부 5년 동안 1인당 소득이 거의 두 배로 늘어나면서 2만달러를 넘게 되었으니 우리 경제도 중진국에서 선진국을 향한 문턱을 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올시다. 참여정부 들어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 수준에 불과하다. 투자와 소비가 극도로 부진한 가운데 수출에 의존한 성장을 하고 있고,북(北) 핵실험으로 경제의 불확실성이 매우 높아졌다. 그런데도 1인당 소득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것은 원화 절상 때문이다. 하지만 원화 절상으로 성장을 떠받치고 있는 수출이 타격을 받으면 경제성장률 저하가 불가피하므로 당장 소득이 증가하는 착시(錯視) 현상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 경제는 선진국의 문턱에서 중진국 함정에 빠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은 후 지금까지 경제성장률은 연 4% 수준으로 주저앉았다. 더욱 걱정스러운 일은 고정투자증가율이 연 1%에 불과하고 소득분배가 악화돼 성장기반이 매우 취약해졌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경제지표만을 놓고 본다면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외환위기 직후 발빠른 구조조정과 함께 우리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자 대내외적으로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평가가 우세했으나 이후 극심한 투자부진과 장기적인 성장침체국면에 진입하자 평가가 바뀌고 있다. 우리보다 먼저 외환위기를 경험한 남미의 여러 나라들도 위기 후 심각한 투자부진과 경제 사회의 양극화로 성장동력이 약화됐다. 이들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으나 또다시 위기를 겪으며 '중진국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역사상 개도국에서 선진국이 된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고 한다.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였지만 경제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내재적 문제점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중도에 멈추고 말았다. 현재 선진국들은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었으나 잘 산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며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측면을 종합하여 판단한다. 소득만 따지면 중동의 부유한 산유국들을 선진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진국 함정에 빠지는 과정은 나라마다 다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소득이 향상되면서 분출되는 욕구를 시장경제 내에 담아내지 못하면 함정에 빠지고 만다. 남미 국가들의 경우 분배와 평등을 지향하는 국민들의 욕구가 차별화를 강조하는 시장체제와 충돌하자 정치적 리더십이 인기영합적 선심(善心)정책으로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중진국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성장과 분배,시장과 정부의 역할에 대해 이념적(理念的)으로 대립하고 있다. 물론 경제선진화도 기본적 가치와 이념의 토대 위에서 진행되어야 하지만 지나친 이념 대립은 바람직하지 않다. 외환위기 이후 거의 10년 동안 우리 경제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지켜보고서도 아직까지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있다면 그만큼 중진국 함정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이끈 덩샤오핑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그는 부유해질 수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유해지라는 선부론(先富論)을 펼치면서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달리 기존의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를 도입했다. 동구의 체제전환국들은 중국의 실용주의적 개혁이 실패할 것이라고 했으나 결과는 훨씬 좋게 나타났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이데올로기나 이념에 기초한 주장만 펼칠 것이 아니라 지난 10년 동안의 경험을 근거로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 선진화 방안을 찾아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