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6시 기상,오후 10시까지 아트 컨설팅·전시기획·컬렉터 작가 면담·화랑협회 업무 조율,해외 전시 유치 준비….이현숙 한국화랑협회장(57·국제갤러리 대표)은 하루를 25시간으로 산다.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가며 활동하는 게 몸에 배어 있다.

올 들어 글로벌 유동성에 힘입어 미술시장이 모처럼 활기를 띠면서 일어난 개인적인 변화다.

올 봄 화랑협회의 제14대 '수장'을 맡으면서 미술시장 활성화를 이끌어온 이 회장은 "아날로그 시대에는 금과 부동산이 유망 투자 대상이었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그림 등 문화상품에 대한 투자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투자를 잘 하려면 잘 고를 수 있는 눈과,사들인 작품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미술투자에 대한 그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문화에 투자하는 국민들이 있는 한 나라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돈이 된다고 해서 미술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산다는 의식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지난 24일 오후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이 회장을 만나 "미술품 투자 붐이 당분간 이어지면서 2~3년 후에는 국내 미술시장도 1조원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그의 전망과 미술품 투자에 대한 조언을 들어봤다.

-한때 부유층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미술품이 새로운 투자 수단으로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주식시장은 불안하고 부동산 역시 각종 규제로 섣불리 투자하기 어렵기 때문에 미술품이 대안 투자로 급부상하고 있어요.

자산운용회사들이 투자자의 자산 포트폴리오 중 하나로 미술품을 포함시키는 추세 역시 미술시장 활성화의 이유로 꼽힙니다.

미국을 비롯해 중국 중동 등 세계 미술시장의 호황도 한국 시장에 영향을 끼치고 있지요.

중국·두바이 경제가 폭발적으로 커지면서 그림 수요층은 늘고 있지만 공급은 한정돼 있으니 작품값이 뛰는 것은 당연합니다.

최근 미국 화단에 돌풍을 일으킨 추상표현주의 작가 잭슨 폴락의 '넘버 5,1948'은 1400억원에 팔렸고,피카소 수작의 경우 1000억~2000억원을 호가하고 있어요."

-최근 아트페어·경매시장 등 국내 미술시장의 규모가 작년에 비해 3배 이상 성장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등 미술시장의 변화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올 들어 KIAF(한국국제아트페어)와 화랑미술제 등 국내 6개 대형 아트페어에는 10만여명의 관람객이 몰려 약 145억7300만원의 판매실적을 기록할 만큼 풍작을 이뤘어요.

지난해보다 판매실적이 2배 이상 늘어난 셈이죠.하지만 국내 미술시장은 아직 미국이나 중국에 비하면 '걸음마' 수준입니다.

올 들어 경매시장에 돈이 몰렸다고는 하지만 서울옥션과 K옥션 등 양대 미술품 경매회사의 올 매출이 500억원에도 못 미쳐요.

300여개 상업화랑의 올 매출은 1000억원 정도로 추산됩니다.

공공 미술시장 약 1000억원,고미술 100억원,미술품 수입시장 1000억원 등을 합쳐봐야 국내 미술시장 규모는 3000억~4000억원 수준이죠.다만 아트페어·경매시장에 직장인·중산층 등이 대거 몰린 것은 '미술시장 대중화'의 청신호로 보입니다.

이런 추세라면 2~3년 후 국내 미술시장 규모는 1조원 이상으로 커질 공산이 크지요."

-10여년간의 불황 터널을 지나 한국 미술시장에 불고 있는 순풍이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는 않을까요.

"1980년대 호황을 누리던 미술시장이 불황에 빠졌던 것은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면서 당시 '큰손'이던 일본 투자자들이 세계 미술시장에서 종적을 감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미술시장의 엔진은 글로벌화했습니다.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 러시아 등 신흥 경제국가의 부호들이 미술시장의 새로운 '큰손'으로 떠올랐어요.

미술시장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계속 늘고 있고 작품에 대한 '식욕'도 매우 왕성해 투자 열풍은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 경제규모에 비해 미술시장이 왜 이렇게 협소하다고 보십니까.

"미술품을 건전한 문화상품으로 보지 않고 축재 수단이나 사치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지금 세계 12위권의 경제대국이지만 국내 근·현대 미술품 경매 최고가는 고작 10억원 수준입니다.

이 정도 경제 규모라면 적어도 국내 미술시장에서 100억원대짜리 작품이 유통될 수 있어야 정상이죠.미술품 수입에 대한 '삐딱한' 시선도 문제입니다.

미술품 수출입은 엄연히 무역거래입니다.

피카소 등 해외 인기 작가의 작품을 싸게 들여와 실컷 감상하고 더 높은 가격에 팔면 외화도 벌고 국민들 문화 수준도 높아지니 '일석이조'지요."

-하지만 국내 미술시장의 순풍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을 것 같습니다.

"미술품에 대한 양도세 면제를 비롯해 미술은행제도,아트페어 지원 등 미술시장 활성화 정책이 시장에서 '약발'을 받고 있습니다만 보다 다양한 세제 지원 및 활성화 방안이 필요합니다.

미국 등 선진국처럼 기업이나 개인이 구축한 컬렉션을 미술관 등에 기증할 때 소득세나 법인세를 감면하는 것이 절실합니다.

외국 미술관의 경우 대부분 소장품은 기증받은 것으로,미술품은 가격이 수십 배 이상 오르는 작품들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장치가 반드시 있어야합니다."

-미술시장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높아진 이유는 뭡니까.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의 경우 1인당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어서면서 문화에 투자하기 시작했지요.

한국은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죠.그림은 잘만 사면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자산 증식에 도움을 주지만 잘못 투자하면 적지 않은 손실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림은 예술품으로 보고 즐기는 동시에 적절한 투자 수익도 올려야 하므로 주식·부동산 투자처럼 작품을 보는 안목을 갖추고 시장의 원리와 흐름을 잘 짚어내야 성공할 수 있어요.

특히 무작정 미술품에 투자해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상품과 작품의 경계를 잘 조율하지 않으면 미술품 투자 자체가 천박해지거든요."

-경매가 미술시장을 견인해 가는 형국입니다.

화랑들 역시 전략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미술품 경매는 작품값의 투명성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화랑에서 파는 작품들은 작가 인지도,작품 크기,작품성 등에 따라 작품값이 다양해질 수 있습니다.

경매처럼 일관된 작품값을 형성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등 작고한 작가나 천경자 이우환 등 시장에서 이미 가격이 형성된 작가들을 컬렉션할 때는 경매시장을 찾는 것이 좋아요.

화랑에서는 가능성이 열려 있는 중견·소장 작가들 가운데 전시를 통해 작품 경향을 꼼꼼히 따져보고 구입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기업 CEO(최고경영자)와 중산층·직장인들의 미술 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미술 '계(契)'를 비롯해 아트 펀드·아트 패키지 상품 등 앞으로 각종 미술 투자 상품이 쏟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경향이 시장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앞으로 미술시장에는 다양한 파생상품이 등장할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아트 펀드의 경우 미국 유럽 등에서는 성공한 사례가 극히 드물어요.

왜냐하면 미술품은 장기 투자 상품이기 때문에 환금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습니다.

하나은행과 우리은행이 연초에 아트 펀드 조성에 공을 들였지만 수익률이 낮고 리스크가 높다는 판단에 따라 결국 철회했지요.

아트 펀드가 '하이 리스크-하이 리턴' 상품인 만큼 선택은 투자자들의 몫이죠."

글=김경갑 기자·사진=양윤모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