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LG필립스LCD는 품질센터와 SCM센터, 모듈센터 등 3개 센터를 폐쇄하고 담당 센터장을 자문역으로 발령하거나 교육을 보내는 등 강력한 문책성 인사를 단행했다.

이는 사장에서 센터장을 통해 연결되는 의사결정구조를 슬림화해 사장이 직접 담당업무를 챙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여타 실적이 부진한 부문의 담당 임원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기도 한 셈이다.

LG필립스LCD의 이런 조치는 부진의 늪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적때문. LG필립스LCD는 지난 2.4분기와 3.4분기에 3천720억원과 3천820억원이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영업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재계 여타 기업의 임원들은 이런 LG필립스LCD의 인사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올해 원-달러 환율 하락으로 인한 수출이익 감소와 유가 및 원자재 가격 급등, 내수 침체에 따른 판매 부진 등 대외악재가 겹치면서 실적이 대부분 부진을 면치못하고 있는 가운데 연말 인사철이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올해는 실적 외에도 각 기업이나 그룹별로 검찰 수사나 재판, 최고경영자(CEO)의 장기 재직으로 인한 혁신 필요성 등 인사 요인이 가중된 상태여서 연말 재계의 인사폭과 방향이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는 상황이다.

각 기업들은 겉으로는 대부분 "인사요인이 크지 않으며 조직의 안정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연말이 다가올수록 총수나 오너의 의중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등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5일 업계에 따르면 매년 1월 중순 사장단 인사를 하는 삼성그룹의 경우 일부 주요 계열사 CEO의 장기 재직과 이에 따른 분위기 쇄신 필요성, 계열사별로 엇갈린 실적 등을 들어 이번 인사에서는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대두했으나 정점으로 치닫고 있는 검찰의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배정 사건 수사가 결정적 변수로 등장했다.

이에 따라 재계에서는 에버랜드 CB 사건 수사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을 경우 삼성이 기존 경영진 중심의 '비상체제'에 돌입할 것이라는 예상이 국면 전환을 위한 '쇄신 인사' 전망보다는 우세한 편이다.

반면에 올해중 에버랜드 사건이 '무난히' 마무리될 경우에는 지난 5, 6년간 사실상 전무하다시피 했던 사장단을 비교적 큰 폭으로 개편함으로써 이건희 회장이 강조한 '창조경영'의 구현과 새로운 도약을 뒷받침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고 재계에서는 보고 있다.

삼성그룹 안팎에서는 삼성전자 CEO 자리를 10년째 지켜오고 있는 윤종용 부회장과 그룹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실력자로 평가되는 이학수 전략기획실장의 거취가 초미의 관심사다.

또한 지난해 현직급 재직연한과 근무평점 등 승진에 필요한 요건을 다 갖추고도 '본인의 고사'에 따라 전무 승진이 무산된 이 회장의 외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의 승진 여부도 주목의 대상이다.

현대차그룹은 환율과 유가, 내수위축 등 대외변수로 인한 실적 부진이라는 인사요인 외에도 정몽구 회장이 옥고를 치른 이후 조직 정비를 위해 대대적인 혁신 인사를 단행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임직원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태다.

특히 수시로 단행되는 돌발인사가 최근 현대차 사태의 원인중 하나로 지목되면서 수시인사를 자제하는 대신 연말 정기인사의 폭이 커질 수 있다는 관측이 고개를 들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경우 환율 하락으로 인한 수출이익 감소와 유가와 원자재 가격 상승, 내수 침체에 따른 판매 부진, 노조의 장기 파업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올해 판매 목표치를 하향 조정하는 등 실적이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정 회장에 대한 재판이 아직 진행중인 만큼 현대차그룹의 현 상황이 대대적인 인사를 통한 변화와 혁신보다는 조직 안정과 사업의 일관성에 무게를 둬야 할 때라는 지적도 점차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다.

더구나 현대차 그룹이 박정인 현대모비스 고문을 현대.기아차 기획총괄담당 부회장으로 복귀시킨 데 이어 비자금사태 이후 공언했던 기획총괄본부를 기획조정실로 축소 개편하는 등 조직개편과 인사를 단행한 이후여서 연말 인사 요인이 많지는 않다는 분석이다.

정 회장은 최근 연말 인사 전망과 관련해 "연말 조직개편은 없다"고 선언한 바 있어 이같은 분석에 더욱 무게가 실리고 있다.

LG그룹도 LG필립스LCD를 비롯한 주요 계열사들의 실적 부진이 인사에 어떻게 반영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LG는 올해 환율하락, 국제유가 상승, 경기침체 등 대내외의 경영 악재로 인해 전반적으로 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가운데 전자, 화학, 통신 등 3개 주요 업종 중 특히 전자, 화학 부문이 실적 부진을 면치 못했다.

이 때문에 LG전자의 대표이사인 김쌍수 부회장의 거취가 주목되고 있으며, 가능성이 높진 않으나 이같은 상황이 LG필립스LCD의 대표이사이자 구본무 회장의 동생인 구본준 부회장의 인사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일고 있다.

그러나 LG전자와 LG화학의 실적이 3.4분기 들어 개선됐고 LG필립스LCD도 올 연말과 내년 초부터는 시황 호전과 함께 수익성이 나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되면서 LG그룹 CEO 인사에 큰 변동이 없을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LG는 올들어 LG화학, LG텔레콤 , LG생명과학, LG데이콤, LG파워콤, LG CNS 등 6개 주요 계열사의 대표이사가 바뀌었기 때문에 대폭적인 계열사 CEO 교체 요인은 별로 없는 편이다.

SK그룹은 SK㈜와 SK텔레콤 등 주요 계열사 실적이 비교적 양호한 편이어서 예년과 비슷한 '안정형' 기조의 중.소폭 임원인사가 단행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다만 해외사업(R&I) 부문장으로 지난해 다른 부문장들과 달리 부사장 승진에서 누락된 유정준 전무 등 일부 중추 인력의 승진 가능성이 주목된다.

사장급 인사에서는 내년 3월로 임기가 끝나는 신헌철 SK㈜ 사장과 김신배 SK텔레콤 사장의 연임 여부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으나, 투자자 신뢰를 기반으로 경영능력을 발휘했다는 내부평가를 받고 있는데다 향후 연속성 있는 투자 확대를 이끌어야 한다는 점에서 연임을 점치는 시각이 우세하다.

재계 관계자는 "올해는 특히 '경영성적표'에 따른 인사 요인 외에도 각 기업마다 특수 상황까지 겹쳐 연말 인사의 방향은 한 치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ks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