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元巖 < 홍익대 교수·경제학 >

북한의 핵실험은 국가 안보는 물론이고,정치 외교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거대 담론을 형성했으며 급기야 이념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참여정부의 이념 갈등은 지금까지 주로 개혁(改革)의 이념과 내용에 대한 좌우간 갈등이었다고 한다면,북한의 핵실험으로 이제는 대북 정책과 주변국과의 협력관계에 대한 좌우간 갈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벌써부터 정부의 대북(對北) 포용정책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렇다면 전쟁을 하자는 말인가"라는 주장이 정면 충돌하고 있다.

북한의 핵실험은 우리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의 안보가 걸린 문제이므로 국제적 공조(共助)를 통해서 해결될 수밖에 없고,경우에 따라서는 주변 강대국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대북 포용정책을 수정한다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며,또한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해서 북한과의 관계를 전면 중단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북핵 문제는 국가 안보와 정치적 문제인 동시에 우리 경제의 지속적 발전과 관련된 경제적 문제다. 따라서 경제적 비용을 제대로 계산하지 않은 정치적 대응은 국민에게 큰 부담과 고통만을 안겨 주게 된다.

역사는 가르쳐 주지 않지만 제대로 배우지 않는 자에게 벌을 준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사려 깊지 못한 정치적 결정으로 국민 생활이 피폐해진 사례가 어찌 없었겠는가?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대륙 침략의 야욕을 보이자 선조는 서인(西人) 황윤길과 동인(東人) 김성일을 일본에 통신사로 보내 동정을 살피게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다르게 보고했다.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인정했고,김성일은 부정했다.

두 사람이 다르게 보고하게 된 것은 서인과 동인이 지지하는 바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서인과 동인이 처음부터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 보니 두 사람의 보고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게 되고,결국 조정에서 약세인 서인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그런데 바로 2년 후 왜군은 부산에 상륙했다. 당시 백성들은 선조 이하 여러 대신들의 피란 행로를 막고 소리쳐 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쟁이 난 후에야 조정은 자신들이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우물안 개구리'였으며,서인인 이율곡의 건의대로 '10만 병력'을 양성했어야 했음을 알게 됐다. 물론 동인들도 병력을 양성해 왜군의 침입을 막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나 몇 년째 계속되는 기근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고 싶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당장 정치적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마음에서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백성들의 생활이 더 피폐해질 수 있음을 제대로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전쟁과 같이 국민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일수록 비용과 수익분석에 철저를 기할 것을 주문해왔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전쟁과 같은 중요한 결정을 하면서도 정치가들은 경제적 비용을 인위적으로 과소평가해 왔기 때문이다. 이번 북핵 위기와 관련해서도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에 따르는 경제적 비용을 추산해보고 그것을 최소화하도록 해야 한다.

지금까지 채택해 온 대북 포용정책의 수정은 정치적으로 부담이 많다. 그러나 '자주'와 '민족공조'를 강조하다 보면 '개방'과 '국제협력'을 등한시하게 된다. 외국 투자자들은 우리 경제가 어디로 가려 하는지 의문을 품게 되고 떠나려 할 것이다. 현재 주식시장에서 외국인투자자 비중이 35%에 이르고 있으므로 이들의 이탈은 우리 경제에 대한 신인도 저하로 이어지면서 일파만파로 번질 수 있다. 경기부양정책을 펴서 이에 대처하려 한다면,이야말로 '병주고 약주는' 꼴이다.

대선(大選)이 있던 2002년의 '정치적 경기부양'이 다음 해에 어떻게 국민들에게 경제적 고통을 안겨 주었는지 되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