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핵실험은 우리들에게 남과 북의 과학기술 수준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남쪽이 지금 과학기술 전반에서는 북쪽을 앞서겠지만,특히 전쟁과 관련된 미사일이나 핵무기 등에서는 북이 훨씬 앞에 있음을 재확인하게 한다. 그 원인을 국내 언론은 몇 사람의 북한 과학자들을 거론하며 설명한다. 또 엊그제 발행된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북한 '핵개발의 아버지'로 이승기,뜻밖의 공로자로 최학근씨를 들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첫째 해방 직후 혼란이 극심했을 때 북한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남에서 과학기술자들을 유인해 갔다. 당시 김일성이 친서를 보내 초빙한 인물 중에는 이승기씨(李升基·1905∼1996)도 있었다. 전남 담양이 고향인 그는 1931년 일본 교토제대(帝大) 공학부를 졸업,1939년에는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또 비날론이란 합성섬유를 개발해 냈다. 해방 후 서울대 공대학장이 되었으나 김일성의 초청으로 1949년 7월 월북했다. 당시에는 "서울대 응용화학과가 통째로 넘어갔다"고 평가될 정도로 해방 직후의 월북 과학자는 아주 많다. 물리학의 경우 서울대 교수 도상록씨(都相祿·1903∼1990)를 비롯 12명쯤이 월북했는데,당시 비슷한 물리학자가 한국 전체에 20명 정도뿐일 때였다.
하지만 이들 월북 과학자만으로 오늘의 미사일과 핵무기가 나온 것은 아니다. 그들 아래 성장한 제2세대가 소련의 두브나핵연구소에 유학해 원자력 전문가로 성장했고,뉴스위크가 거론한 최학근씨는 그런 인원 200여명 가운데 한 명이다. 그는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에 가입해 있던 1974년부터 4년 동안 빈에 참사관으로 가 있으면서 도서관을 뒤져 세계의 원자력관련 자료를 한껏 수집해 갔다고 뉴스위크는 전한다.
둘째로는 북한의 과학기술 진흥을 위한 체계적이고도 치밀한 노력을 들 수 있다. 조직적으로 남쪽에서 과학자 기술자를 유치해 간 북측은 과학기술을 나라 세우기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파악하고 처음부터 열심히 그 조직정비에 힘썼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초 북한의 과학기술자들은 폭격을 피해 지하 벙커에서 과학원을 창립했다. 이 자리에는 김일성도 참석했다. 과학원은 과학 연구와 행정을 모두 도맡는 기구로서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현재 그 아래 소속된 원자력 관련 연구소만도 10개가 넘는다. 성격은 다르지만,남쪽에 그 비슷한 과학기술 총괄기구로 과학기술처가 생긴 것은 거의 20년이 뒤진 1969년이다.
셋째로는 국가 주도의 집중적 연구개발 효과를 들 수 있다. 초기의 집중적 과학기술 개발 사례는 이승기의 비날론 공장이다. 1961년 5월 연산 2만t의 비날론 공장 완공은 북한 중공업 건설의 기적이었다. 그것은 조선인의 발명을,조선의 원료로 생산해,조선인의 의류혁명을 불러온,조선의 '주체적' 업적이었다. 곧 '주체 섬유'라는 별명이 생겼고,북쪽의 의식은 '주체 과학'을 거쳐 '주체 사상'으로 확대돼 오늘에 이른다. 정치적 특성 때문인지 그들에게는 일단 과제가 주어지면 집중적으로 이를 해결해 가는 능력이 탁월하다. 1981년 여름 당시 공산국가였던 루마니아의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제15차 국제과학사 회의에서 필자는 처음으로 북한 학자 셋을 만났다. 필자가 우리 역사상의 자연현상 기록을 모아 연구한다고 하자,북의 학자는 이미 자기들은 그 기록을 전부 모아 놓았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그가 덧붙인 말은 "그런 '집단 연구'는 우리가 잘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몇 가지 원인으로 북쪽은 일부 과학기술에서 남쪽을 압도한다. 남파공작원 김진계의 회고록 '국가'(1990)를 보면,그는 평양에서 혜산시로 가는 기차 속에서 인민군 소장 계급장을 달고 부관 상위와 함께 아침식사하는 이승기 박사를 만났다. 그는 양강도 강계에 있는 원자력연구소에 가는 길이었는데,동행한 지도원은 비밀 정보라며 그들이 이미 중거리 미사일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40년 전 얘기이다. 국가가 필요로 한다면 섬유공학자도 소장 복장을 입혀 원자력 집단 연구에 동원할 수 있는 곳이 그곳이다. 목적이 무기개발에 있겠지만 북한의 과학 기술 육성 의지는 알아줘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