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奎載 < 논설위원ㆍ경제교육연구소장 >

"인간은 언제나 지나간 과거를 좋았던 시절로 회고하는 특이한 사고경향을 가졌다"고 말한 사람은 아널드 하우저였다.

어느 시대나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세상이 점차 타락해 이러다가는 무슨 사단이 날 것'이라는 걱정도 그런 사고 경향의 하나다.

비외른 롬보르 덴마크 국립환경연구소장은 '이러다 지구가 망하고 말 것'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좌파 환경보호운동도 그런 사고경향의 편린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근본주의 환경론은 과학의 이름을 내세운 종말론(終末論)적 교의에 불과하다는 해석이다.

지구에 새로운 도전적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생각이 지구 환경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가능성은 오히려 제로라는 것이 주장의 골자다.

오늘날 한국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허다한 주제들에서도 종말론적 논쟁 구조는 쉽게 관찰된다.

TV에서 붐을 이루고 있는 고대사 드라마도 대표적인 사례다.

민족사는 언제나 웅대했던 과거를 회고하기에 바쁘고 그 신화는 갈수록 부풀려진다.

요는 '옛날에는 좋았는데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경제 분야에 오면 이 같은 세계관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

경제가 성장할수록 빈부격차가 커진다는 생각도 그렇지만 '경제가 갈수록 인간의 얼굴을 잃어가고 있다'는 근거없는 비관론도 넘쳐난다.

대표적 성공 사례인 한국의 경제개발조차 이런 범주를 벗어나기 쉽지 않다.

종말론적 사고에 따르면 한국 경제는 식민지 수탈 경제에선 벗어났지만 더욱 악랄한 국제자본의 약탈장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갈수록 나빠지고 있을 뿐 개선의 조짐은 전혀 없다. 종말론자들은 엄연한 기초 통계들조차 액면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2차 대전 이후 이만큼 먹고 살 만해진 곳은 한국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조차 이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로지 한국이 채택한 미국식 시장경제 질서가 인간의 삶을 파괴해왔다고만 굳게 덧칠하고 있을 뿐이다.

걸인들이 줄을 잇고 평균 수명이 40세를 겨우 넘겼던 불과 두 세대 전의 역사도 결코 믿지 않는다.

신생아의 절반이 죽었고 그 시절이야말로 봉건적(封建的) 계급 착취가 횡행했다는 점도 인정하지 않는다.

시장경제를 통해 이만큼 잘살게 된 것도, 대외 개방 노선을 통해 나라 살림이 이만큼 펴진 것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모든 것을 부정으로 일관한다.

이런 사고를 일컬어 사이비 종말론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달리 부를 적당한 말이 없다.

이런 사고 경향은 전문가 집단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도 없다.

개발연대의 거의 모든 경제정책에 반대해왔던 어떤 노(老) 교수는 지난달에는 한·미FTA에 반대하는 긴 명단에 또 이름을 올렸다.

이 노 교수는 고속도로 건설에도, 수출드라이브 정책에도, 공업화 정책에도 모조리 반대표를 던져왔다.

오로지 한국 경제의 파멸을 주술적으로 예언하는 사이비 교주 노릇에 평생을 바쳐왔던 것이다.

세속적 종말론의 완성 형태였던 공산주의가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듯이 전문가라고 해서 종말론적 교의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참여정부의 문제는 바로 그 종말론적 교의에 사로잡혀 해방후 60여년 전체를 오류의 역사로 보고 저주의 굿판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개발연대는 소수 재벌에 의한 수탈 체제요 지금은 신자유주의의 각축장으로 변질된 '나빠진 역사,나빠지고 있는 역사'로 과거사를 제멋대로 재단하고 있다.

그 때문에 이들이 주장하는 개혁이래봤자 모두 종말론적 자기부정이 될 수밖에 없다.

시장에 대한 부정,기업에 대한 부정,성취에 대한 부정,진보에 대한 부정이 이들의 주특기다.

참여정부가 해방후 한국이 이루어낸 모든 성취물들을 부수어내는 일에만 열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사를 선악 대결의 구도로 설명하는 것은 종말론의 특징 중 하나다.

시장경제와 미국과 재벌은 종말의 심판을 받아야할 악의 세력일 뿐이다.

그렇게 관념의 모래성은 쌓이고 국가 정체성 논란 속에 지난주 해방 61주년이 지나갔다.

사이비 종말론의 종말은 불행히도 집단자살이었다는 점이 너무도 걱정스러울 뿐이다.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