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와 대학 동문인 권오규 경제부총리와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관료와 정치인이라는 서로 다른 길을 걷다가 같은 시기에 큰 봉우리에 올랐다.

권 부총리는 조달청장(2002년 7월~2003년 2월) 외에는 변변한 장 한번 못했지만 대통령의 신임을 얻어 청와대에서 고속승진,경제팀 수장이라는 명예를 안게 됐다.

김 의장은 대권을 꿈꾸고 있으면서도 후보 대열의 꼴찌군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물이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우리당은 5·31 지방선거에서 참패,쓰러진 초막집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했다.

그래도 어찌됐든 선장으로 들어섰다.

대권 주자의 이미지를 눈곱만큼이라도 각인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

둘다 무엇인가에 승부를 걸 만한 상황이고 그러기를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아쉽게도 그저 그렇게 시작하는 듯하다.

취임 한 달이 갓 지난 권 부총리는 경기인식에서부터 경제정책방향에 이르기까지 자리를 거는 듯한 각오가 보이지 않는다.

논란이 되고 있는 출자총액제한 철폐를 놓고 경제부처간에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수장의 리더십으로 제압하지 못하고 있다.

권 부총리는 취임한 지 며칠 안돼 기업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기업활동 전반에 걸쳐 규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늘 들어온 소리다.

취임 일성으로 규제완화를 약속하지 않은 부총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수도권 공장이나 교육,보육,의료 등 곳곳에 여전히 촘촘한 규제그물이 덮여 있다.

옥쇄(玉碎,기꺼이 목숨을 바침) 하겠다는 각오로 달라붙어도 될까말까한 규제혁파를 '개선하겠다'는 정도의 느슨한 자세로 시작하고 있으니 기대를 거는 기업인이 있을 리 없다.

김 의장은 권 부총리보다는 '움직이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긴 한다.

취임하자마자 경제단체를 차례로 방문, 투자를 요구하며 친 기업정책을 펴겠다는 '뉴딜'에 시동을 건 것은 전임자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일부 경제부처가 버티고 청와대도 시큰둥해 의도한 만큼 이뤄낼지는 미지수다.

좌파적으로 비쳐진 자신의 정치 색깔을 버리는 듯한 행보에도 좀처럼 탄력이 붙지 않는다.

대통령의 '동지들'은 다 사면됐지만 김 의장이 약속한 재벌총수 사면은 공수표가 됐다.

"그 정도의 힘으로 무엇을 하겠나.

역시 별 수 없군"하는 수군거림이 재계에서 나오고 있다.

법제정 및 개정 권한을 갖고 있는 의회의 힘으로 규제철폐나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주도해 뉴딜을 뛰어넘는 대변신을 시도해야 한다.

'경기는 이미 꺾였고 내년은 더 나빠질 것'(삼성경제연구소의 14일 보고서) 이라는 우려가 높다.

미국 경기는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중국 경기도 고개를 숙일지 모른다.

임기말이라고 눈치를 보거나 '명예와 권한'이나 즐기다 갈 만큼 경제상황이 한가하지 않다.

경제부처와 여당의 선장이 된 두 사람이 국정에 책임감을 느낀다면 옥쇄를 각오해야 한다.

아쉬울 것이 없을 만큼 정점에 오르지 않았는가.

고광철 국제부장 g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