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사람들은 서리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갖고 있다.

떼를 지어 남의 물건을 장난 삼아 훔쳐 먹는 서리는 계절마다 그 대상이 달랐다.

자두 복숭아 사과 등 과일에서부터 감자 고구마 콩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하게 서리를 했다.

그중에서도 닭서리는 고난도의 기술을 요했다.

잘못 잡으면 옆에 있는 닭들이 목청껏 울어젖히는 통에 주인에게 들키기 십상이었다.

서리를 할 때는 우선 의기가 통하는 몇몇이 모여 작당을 한다.

소위 작전을 짜는 것으로 보스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미리 사전 답사를 한 뒤 '공격 앞으로' 명령이 떨어지면 현장까지 신속하게 달려간다.

과수원 서리가 가장 많았는데 원두막의 동정을 살피고 나서 과수나무까지 낮은 포복으로 접근한다.

침묵이 제1 수칙인데도 초보자들은 당황해 소리를 내기 일쑤여서 주인에게 쫓기곤 했다.

집안의 물건을 서리할 경우는 더욱 세심하게 여러 조건을 따졌다.

개가 없어야 하고,들키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는 집이어야 하고,실패해도 쉽게 도망치거나 숨을 수 있는 지형지물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친구들과 어울려 서리를 하면서도 몇 가지 불문율은 꼭 지켰다.

먹을 만큼만 훔치고,덩굴이 상하지 않게끔 밭고랑을 밟고 다녔으며,포기를 뽑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자칫 농사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 청계천변에 때아닌 '사과서리' 비상이 걸렸다.

청계천 복원을 기념해 심어놓은 116그루의 사과나무 열매를 시민들이 재미삼아 따가고 있어서다.

시 당국은 나무마다 안내문을 붙여 시민들의 양식에 호소하고 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궁리끝에 자원봉사자와 공익요원을 동원해 24시간 순찰을 돌겠다고 발표했다.

'사과열매 사수작전'인 셈이다.

사실 몇 사람이 관심만 가져도 이만한 사과쯤은 얼마든지 지켜낼 수 있는 일이다.

청계천을 따라 주렁주렁 달릴 빨간 사과는 생각만 해도 즐겁다.

무심코 저지른 사과서리가 시민들의 즐거움을 앗아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박영배 논설위원 young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