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에서 노란색 에쓰오일 주유소 간판을 찾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전국에 1600개가량의 주유소가 있지만 4000개가 넘는 빨간색 간판 SK 주유소와 비교하면 절반에도 못미치는 숫자다.

하지만 주유소 숫자로만 에쓰오일이 국내 정유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가늠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에쓰오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수출을 하는 정유업체다.

매출액 대비 이익률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사실상 국내 정유업계를 리드해왔다"는 에쓰오일 고위 임원의 자신감도 이런 면에서 설득력이 있다.

지난 28일로 회사 창립 30주년을 맞은 에쓰오일에 재계의 눈과 귀가 쏠리고 있다.

매각을 추진 중인 자사주 28.4%의 향방도 관심거리지만 7%가 넘는 영업이익률과 50%가 넘는 매출액 대비 수출비중의 비결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최근 초등학생들이 습관적으로 흥얼거린다는 CM송(에쓰오일쏭)마저 에쓰오일의 전성기를 노래하는 듯하다.

한 발 앞선 투자

"1991년 당시 1조원이라는 돈은 지금의 1조원과는 차원이 다른 규모입니다. 다른 업체들은 에쓰오일이 미쳤다며 비웃었죠. 하지만 당시 경영진들은 석유시장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에쓰오일의 한 고위 임원은 현재의 에쓰오일을 가능케 했던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1991년을 꼽았다. 정부의 통제 아래 5개 정유사가 시장을 나눠갖고 안주하던 시절 에쓰오일은 벙커C유 같은 중질유의 수요는 줄고 휘발유 등 경질유는 모자라는 시대가 오리라는 판단 아래 고도화시설(BCC) 건립을 추진했다.

원유를 1차 정제하면 값싼 벙커C유가 약 40%가량 나오는데 이를 다시 한번 정제해 값 비싼 휘발유,등·경유로 분해하는 설비가 바로 BCC. 공장에서 기름을 뽑아내다보니 '지상유전'이라고도 불린다.

김 선동 당시 쌍용정유 부사장(현 에쓰오일 회장)은 1조원이 넘는 투자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상을 지내고 있는 나이미 당시 사우디 아람코사 사장과 담판을 통해 4억달러의 외자를 유치,합작 계약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1996년 처음으로 중질유분해시설을 가동할 수 있었다. 원유의 안정적인 공급과 미래를 위한 투자 비용 마련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순간이었다.

"에쓰오일의 시장 전망은 딱 맞아 떨어졌죠. 우리를 시샘하고 심지어 모함까지 했던 다른 정유사들도 최근 들어 너도 나도 BCC를 짓겠다고 하고 있는 게 그걸 반증하는 것 아닙니까?" (김동철 에쓰오일 부사장)

수출의 역군 에쓰오일

에쓰오일의 지난해 수출액은 6조8000억원. 총 매출액 12조2000억원의 56% 수준이다. 물량으로 따지면 9113만배럴로 국내 1위 정유사인 SK(9021만배럴)보다 많다. 우리나라 석유제품 총 수출량의 34.8%를 차지하는 수치다.

사실 에쓰오일이 수출을 시작한 것은 1981년 처음 경남 온산 공장을 가동할 때부터였다. 후발업체로서 경쟁사들과 내수 시장을 놓고 경쟁하기보다는 해외 시장 개척에 주력하자는 판단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에쓰오일의 수출전략은 2000년대 들어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고유가 상황이 지속되면서 수출 제품의 정제마진이 국내에서의 마진보다 훨씬 높아졌기 때문. 수출에서는 국제 가격의 변동을 철저히 향유할 수 있지만 국내 시장에서는 소비자에게 가격 인상분을 완전히 전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회사 관계자는 "내수시장은 공급과잉 상태인 데다 점유율을 1% 올리는 데 수천억원의 마케팅 비용이 들어가고 주유소 한 개를 짓는 데는 20억원가량의 돈이 든다"며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석유제품을 수출해 외화를 벌어들이는 에쓰오일이야말로 애국하는 기업이 아니냐"고 말했다.

또 하나의 에쓰오일 건설


에쓰오일은 최근의 전성기를 제2도약의 주축돌로 삼는다는 구상이다. 그동안 벌어들인 돈으로 충남 서산에 제2의 정유공장,즉 제2의 에쓰오일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이다.

물론 이 공장의 타깃 시장도 국내가 아닌 중국 시장이다. 정제시설 자체보다는 제2의 BCC를 짓는 게 서산공장 건설의 진짜 이유라는 점도 이 공장이 에쓰오일의 기존 성공 전략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3조6000억원을 들여 하루 정제능력 48만배럴의 정유공장을 짓는다는 이 계획은 다시 한번 업계의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중국 수출을 겨냥한 이번 프로젝트가 1991년의 BCC 투자처럼 다시 한번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것.

물론 에쓰오일은 "지켜만 보라"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중국 내에도 정제시설이 많이 들어서겠지만 석유제품에 대한 수요는 그보다 더 빨리 늘어날 것이라는 계산에서다. 대주주인 사우디 아람코에서 파견된 투바이엡 에쓰오일 최고경영자(CEO)는 "이 공장을 통해 2010년 매출 20조원,영업이익 2조원을 달성하겠다"고 지난 28일 발표하기도 했다.

에쓰오일의 이런 미래 구상은 28.4%의 자사주 매각과 따로 떼어 설명할 수 없다. 2조원이 넘는 시가에 아람코(지분율 35.0%)와 공동으로 경영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롯데그룹과의 협상도 부진한 상태지만 "현재 나온 인수합병(M&A) 매물 중 에쓰오일만큼 훌륭한 건 없다"는 경쟁사 SK 임원의 말은 누가 자사주를 가져가더라도 '복덩어리'를 가져가는 것이 틀림없다는 걸 반증한다.

제2정유공장으로 아시아 지역 경질유 공급의 허브로 부상한다는 야심찬 계획은 이런 에쓰오일의 기업 가치를 더욱 올려 놓을 전망이다.

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