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선 법원의 판사가 부동산 명의신탁의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리면서 이와 배치되는 대법원 판례를 신랄하게 비판,파장이 예상된다.

이와 유사한 판결이 앞으로 계속 나올 경우 부동산 시장의 명의신탁 관행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부동산 명의신탁자의 권리를 인정해 온 대법원 판례를 바꿔야 한다는 논의도 본격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15일 대법원에 따르면 서울 서부지법 민사 2단독 이종광 판사(38·사시 36회)는 부동산 강제집행을 피하기 위해 외삼촌 정모씨에게 부동산 명의신탁을 해 두었던 박모씨가 이 부동산의 소유권을 되찾겠다며 정씨를 상대로 낸 소유권이전등기 청구소송에서 지난 9일 원고패소 판결했다.

박씨는 1997년 외환위기로 경영하던 회사가 어려움에 처하고 채권자들로부터 부동산 강제집행을 당할 상황이 되자 이듬해 1월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에 있는 주택의 소유권을 외삼촌에게 넘겼다.

이후 상황이 나아지자 박씨는 이 주택의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외삼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판사는 "박씨는 채권자의 강제집행을 피할 목적으로 해당 부동산의 소유권을 외삼촌에게 이전해 놓은 것"이라며 "이에 대한 반환 청구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 판사는 판결문에서 "박씨와 같이 채무를 피하기 위한 목적의 명의신탁을 인정해 줄 경우 채권자들이 아무런 권리도 행사할 수 없게 된다"고 밝혔다.

이 판사는 특히 48쪽에 이르는 긴 판결문을 통해 부동산실명제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부동산 명의신탁을 인정해 온 기존 대법원 판례를 반박했다.

그는 판결문에서 "그간 법원이 명의신탁의 효력을 인정해 주는 가운데 부동산 투기와 탈세 등에 이 제도가 악용됐다"고 비판했다.

이 판사는 이어 "명의신탁으로 인한 각종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1995년 부동산실명제가 도입됐는데 법원이 이 제도의 정착을 방해한 면이 없는지 살펴볼 시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대법원은 헌법상 계약자유의 원칙을 근거로 개인 간의 명의신탁 약정이 유효하다는 판례를 고수해 왔다.

이 판사는 "그동안 명의신탁의 효력을 부정한 하급심 판결이 대법원까지 올라가지 않아 대법원이 판례를 통해 입장을 정리할 기회가 없었다"며 "늦은 감은 있지만 이 문제가 논의될 시기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에서 피고 측을 대리해 승소한 오용운 변호사는 "부동산 명의신탁으로 인한 폐해가 크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라며 "재판 과정에서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해 상급심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