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6월의 모스크바는 승용차 와이퍼를 훔쳐갈까 봐 주차할 때마다 떼내 차안에 넣고 잠그던 15년 전과는 판이했다.

크렘린궁쪽에서 모스크바강을 건너는 아름다운 다리가 LG의 초콜릿 휴대폰 광고로 덮여 'LG다리'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외국회사들의 진출이 급증, 시내는 한층 밝아졌고 시민들의 발걸음엔 힘이 넘쳤다.

경제성장률은 6%를 넘나들고 지난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5361달러로 4년 만에 배 이상으로 늘어난데다 벤츠 BMW 렉서스 쏘나타 같은 외제차들이 쏟아져 들어와 시내 곳곳은 늘 정체를 빚었다.

호주머니가 두둑해진 중상위층이 뿜어내는 소비로 수입은 연간 30%씩 늘고 있다.

어엿한 G8(서방선진7개국과 러시아) 회원국으로서 다음달 옛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G8 정상회담을 주최할 만큼 자신만만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강한 러시아'를 표방하면서 옛 소련 붕괴 이후 무너졌던 러시아의 자존심을 되살려냈다.

가즈프롬 같은 국영 에너지회사를 앞세워 경제와 언론을 통제하고 있음에도 그는 '인기짱'이었다.

하지만 외국투자회사와 그 주재원들,관광객들의 얼굴까지 밝지는 않았다.

경제가 몰라보게 좋아졌지만 하부구조를 지탱하는 소프트웨어는 15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공항에서부터 얼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자존심이 너무 강해졌는지 작년부터 입국심사증에 영어를 없애버려 러시아어를 모르는 관광객들을 당황케 했다.

1∼2분도 안돼 입국심사가 끝나는 상하이 국제공항과 달리 모스크바 국제공항의 심사원들은 제정 러시아의 관료들을 연상케 할 정도로 굳은 얼굴로 관광객들을 달갑지 않게 맞았다.

문화유산과 유럽풍의 아름다운 도시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관광객들은 하룻밤 150달러를 주고도 중급호텔조차 잡을 수 없을 정도여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체크인할 때는 이런 곳에 굳이 와야 하는지 회의가 들 정도로 답답했다.

G8에 들어간 나라답지 않게 민간계약은 지켜지지 않았다.

3년으로 한 아파트 계약을 어느날 갑자기 파기하겠다고 통고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정상통관이 안돼 물류창고 하나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관료들에게 뇌물을 주지 않으면 일이 풀리지 않는다는 게 외국기업들의 하소연이었다.

성숙한 경제의 상징인 투명성이 크게 개선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외국회사들은 오일달러가 넘쳐나는 이 시장을 외면하기 어렵겠지만 러시아 정부가 '목마른 놈이 우물 파라'는 식의 투자환경을 고집할 경우 또 다른 도약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 프런트에 꽂힌 영어판 모스크바 타임스에 실린 회계법인 언스트 앤 영의 러시아 투자환경 기사가 그런 생각을 굳히게 만들었다.

전 세계 기업인 1019명을 상대로 한 투자환경조사에서 지난 2년간 세계 8위를 차지했던 러시아가 올해는 10위권 밖으로 밀렸다는 내용이었다.

법이 지켜지지 않고 투명성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중국과 인도가 1,2위를 차지했다.

러시아 경제의 버팀목인 유가가 떨어진다면 더 아찔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고광철 국제부장 모스크바=gw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