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1일(한국시간) 대북 경수로사업의 종료를 공식 선언하고 청산방법에 합의함에 따라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합의로 탄생한 경수로사업이 운명을 다하게 됐다.

이는 북핵 문제로 2003년 12월부터 두 차례에 걸친 1년씩의 공사중단 조치에 이어 작년 9월 6자회담 공동성명에 KEDO 경수로 대신 200만kW 전력을 북한에 직접 송전하는 우리 정부의 계획인 `중대제안'이 들어가면서 일찌감치 예고된 일이었다.

이 때문에 이번 종료선언은 작년 11월 KEDO 집행이사회에서 경수로사업 종료선언을 유보한 이유가 됐던 청산 방법에 이사국들이 최종 합의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 기자재 소유권 얻고 청산비용 전담 = 청산 해법을 놓고 지난 6개월 간 벌인 협상의 핵심은 청산비용 분담 문제였다.

경수로 건설비의 70%를 들인데 이어 `중대제안'으로 막대한 대북 송전비용까지 모두 부담하겠다고 장담한 우리 정부로서는 우리만 부당하게 많이 댈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미국 및 일본은 아예 청산비용 부담 자체에 거부감을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협상 초기에 우리측은 한미일 3국 간 균등부담안을 내놓았지만 미국과 일본은 재정적으로는 물론 법률적으로도 `면책'을 주장하며 발뺌했다.

정부는 이에 따라 올해 초 이른바 `일괄 청산 방안'을 제시했다.

이날 KEDO 집행이사회에서 최종 합의한 일괄 청산 방안은 경수로사업의 주계약자인 한국전력[015760]이 북한 밖에 있는 KEDO 기자재에 대한 모든 권리를 인수하는 대신 청산비용도 모두 부담하는 게 골자다.

이에 대해 어차피 경수로에 쓴 돈이 한 푼도 없는 미국은 `OK'한 반면 일본과 유럽연합(EU)은 한전의 과다이익 발생 가능성을 문제삼았다.

이에 우리측은 손실이 생길 경우 이를 처리하는 문제도 규정해야 한다고 파고들면서 `공정하고 형평성 있는 처리'라는 문구에 합의하기에 이르렀다는 후문이다.

이날 결정에 따라 한전이 인수하게 될 `북한 밖에 있는 KEDO 기자재'는 원자로 설비 23종, 터빈 발전기 관련 9종, 보조기기 관련 20종 등 모두 8억3천만달러 상당이라는 게 한전측 설명이다.

이 중 상당수는 두산중공업[034020] 등 국내업체가, 나머지는 웨스팅하우스, 히다치, 도시바 등 미국과 일본, 캐나다, 독일, 프랑스 업체들이 제작하던 것들이다.

이에 맞물리는 청산비용은 KEDO의 미지급금 5천만달러와 참여업체의 클레임 비용 1억5천만달러 등 최대 2억달러로 추산하고 있다.

이 때문에 단순하게 계산하면 한전에게는 6억3천만 달러가 이득인 셈이다.

다만 8억3천만달러는 지금까지 해당 기기를 제조한 업체에게 계약에 따라 지급한 액수인 만큼 감가상각을 감안해 재평가할 경우 가치는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고위 당국자는 "한전이 (일괄 청산 방안에 대해) 흔쾌히 수락했다"며 "최소한 한전이 손해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 청산절차 착수하고 KEDO도 간판 내려= 원래 KEDO와 한전 사이의 턴키계약에 따르면 한전은 사업 종료 후 협렵업체들로부터 클레임을 접수해 KEDO에 청구한 뒤 돈을 받아 나눠 가지면 나머지 문제는 KEDO가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전이 KEDO의 기자재를 인수하는 대신 청산비용을 부담하는 만큼 절차가 오히려 간단해졌다.

한전이 KEDO와 `사업종료 이행계약'을 체결하고 클레임을 받아 돈을 물어주면 빚잔치는 사실상 끝나기 때문이다.

한전은 이에 따라 종료선언을 근거로 계약이 해지된 만큼 클레임을 제기할 것을 참여업체들에게 알리고 그 내용을 집계하는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아울러 참여업체들의 클레임 제기 내용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작업도 벌이는 것으로 전해졌다.

계약 건수가 114건, 참여업체가 68개 업체지만 이들 업체가 하도급을 준 경우도 적지 않은 만큼 관련 업체는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이 작업에만 6개월 가량이 걸릴 것으로 정부와 한전은 보고 있다.

계약서에는 `위약금'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사업이 중단되면 각 업체는 계약이 완성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투자한 금액을 손실로 보게 돼 있는 만큼 그동안 투입한 비용에 대한 직간접적 손실에 대해 클레임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와 함께 뉴욕에 본부가 있는 KEDO도 연내에 간판을 내리게 될 전망이다.

2002년 50명에 달했던 KEDO 직원은 지난 해까지 35명 안팎으로 줄어든 데 이어 이날 이사회 결정으로 최소 필수요원만 청산 절차 마무리를 위해 남고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 기자재 재활용에 의문 = 최대 관심사는 청산비용 부담의 대가로 받는 KEDO 기자재를 통해 청산 비용을 뽑을 수 있는지 여부에 쏠려 있다.

투입비용 기준으로 따지면 8억3천만달러나 되지만 재활용이나 처분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관측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와 한전은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일본이나 EU가 한전의 초과이익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이를 방증하는 정황이 되고 있다.

우리측이 제시하는 가능성은 크게 세가지로 추릴 수 있다.

100만kW급 신규 원전건설안을 장기 전원개발계획에 집어넣은 방안과 해외 수주활동에 활용하는 방안, 이미 운영중인 국내 원전의 보수용 자재로 쓰는 방안 등이다.

그러나 현재 계획 중인 원전건설계획에는 100만kW급 한국형 표준원자로가 아니라 1기에 140만kW짜리 신형 경수로가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새로 계획을 짜 100만kW짜리 구형 원자로를 쓴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게다가 원전 입지 확보가 어려운 실정을 감안하면 더더욱 힘들어 보인다.

이와 함께 해외 수주에 나서더라도 헐값에 팔지 않는 한 구형 원자로에 대한 수요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활용 방안이 다소 군색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적지 않은 상황이다.

결국 한전에는 약이 될 수 있지만 독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실제 이사국 간 협상과정에서 한전의 과다이익 발생 가능성을 지목한 일본 등의움직임에 대해 우리 정부가 손실 가능성을 언급한 것도 정부와 한전의 결정이 기회와 함께 리스크도 함께 떠안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이번 사안은 상장기업인 한전의 중요한 경영판단 사항에 해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만 한전은 청산방법에 이미 합의한 상태인 지난달 30일 현재까지도 이사회를 통해 이번 청산방안을 공식 의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정부 당국자는 "일본이 해당 기자재를 가져간다면 원자로 노형이 달라 쓸모가 없겠지만 우리는 다르다"고 말했다.

한전 관계자는 "우리는 매각할 경우 완제품 상태로 만들어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미국, 일본, 캐나다, 독일, 프랑스 등에서 제작해 온 기자재를 국내로 들여와 보관하는 일 자체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일각에서는 6자 틀 내에서 적절한 시기에 북한에 경수로 제공문제를 논의한다는 6자회담 공동성명 문구를 들어 향후 북핵 문제가 해결된 뒤 새로운 경수로 제공논의가 시작될 경우 재활용될 가능성을 제기하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한편 한전의 인수 대상에서 제외된 KEDO 자산인 함경남도 금호지구 내에 묶여 있는 중장비와 트럭 93대와 차량 190대, 각종 설비와 비품 등 모두 450억원 어치의 물품은 KEDO가 소유권을 재확인했지만 돌려받기 어려울 전망이다.

◇ 북한 반발, 11억달러 상환방법도 관심= 우리가 경수로 건설에 투입한 11억3천700만 달러는 남북협력기금 경수로계정에서 KEDO에 차관 형식으로 제공한 것이지만 사업 종료로 인해 손실로 처리할 수 밖에 없게 됐다.

경수로 완공 후 KEDO가 3년 거치 기간을 포함해 20년간 무이자로 연 2회에 걸쳐 북한으로부터 균등 분할상환받기로 돼 있지만 중도에 완전히 중단되면서 북한으로부터 받을 길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협력기금 경수로계정은 공공자금관리기금(공자) 예수금으로 마련한 것으로, 꼭 갚아야 한다.

지금까지는 공자예수금으로 공자예수금을 갚는 `돌려막기'를 해 왔다.

결국 남북협력기금 경수로계정은 빚더미에 오르게 된 만큼 이를 변제하기 위한 재원 확보가 정부의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애초 경수로 재원조달 방안으로 과거 전기요금에 3% 이내에 부과하는 방법이나 에너지 세제개편에 따른 세수초과분을 활용하는 방안, 담배 등에 부담금을 부과하는 방법 등이 검토된 바 있지만 현재로서는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낳고 있다.

2003년 11월부터 미국을 겨냥해 보상 요구를 했던 북한의 움직임도 관심사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작년 12월19일자 `상보'를 통해 "경제적으로 직간접적으로 수백억 달러의 물질적 손실을 입었다"며 미국의 보상 의무를 강조한 바 있어 공식 종료가 선언된 만큼 실제 행동으로 옮겨질지 주목된다.

정부는 이에 대해 북한이 현재 콘크리트 더미가 남아 있는 금호지구 현장을 원상복구해 놓으라는 주장을 내놓을 개연성은 없지 않지만 협정 파기를 문제삼아 전면적인 보상을 요구할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보는 분위기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날 KEDO측은 종료 결정이 "북한측이 경수로 공급을 위한 공급협정상의 필요한 조치들을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행하지 않아 이뤄진 것"이라며 북한의 책임을 명시한 만큼 책임공방이 재현될 가능성도 없지 않아 보인다.

(서울연합뉴스) 정준영 기자 princ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