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오후 2시 카라카스시 대통령궁 앞.가뜩이나 막히는 도로가 아예 통제 상태다.

도로엔 200여명의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대통령궁 앞인 만큼 반정부 시위려니 했다.

아니었다.

"한 외국회사가 개정된 노동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부당노동행위를 대통령에게 고발한다고나 할까.

베네수엘라는 그들의 표현대로 '혁명 중'이다.

노동법이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개정됐다.

의약품 휘발유 통신료 등의 가격도 통제된다.

작년 10월엔 '불법외환통제법'이 발효돼 모든 외환입출입이 정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헌법위반임에도 불구하고 '라티푼디움'으로 유명한 대농장제도를 해체하기 위한 사유지 및 유휴시설 압류도 늘어나고 있다.

처음엔 반발했던 기업인과 농장주들도 꼬리를 내리고 있다.

모나가스주에서 오랫동안 토마토생산공장을 운영했던 미 식품가공회사인 하인즈(Heinz)는 최근 베네수엘라에서 철수했다.

'유휴시설이 많고 공장가동률이 낮다'는 이유로 공장압류를 통보받자 주정부에 공장건물을 매각해 버렸다.

법원에 호소했던 기업들도 차츰 정부와 타협을 꾀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집권층의 부패와 아마추어리즘이 상당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다수인 빈민층의 지지를 이끌어낸 데다 기업들의 반발도 수그러들자 차베스 정부는 자신감이 붙었다.

그 자신감의 결과가 바로 자원국유화다.

처음엔 외국 기업이 철수할 것이란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기우였다.

32개 유전을 소유했던 기업 대부분이 지분의 60% 이상을 국영석유공사(PDVSA)에 넘겼다.

3130억배럴(초중질유 포함)의 매장량으로 세계 1위인 베네수엘라를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탈리아와 프랑스 기업 2개만이 국제소송을 외치고 있지만 차베스 정부는 들은 척도 안 한다.

자원국유화는 고유가에 따른 오일머니를 고스란히 정부 곳간에 쌓이게 하고 있다.

하루 300만배럴 생산되는 원유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은 연간 500억달러.바로 차베스 대통령을 반미(反美)의 선봉에 서게 만드는 디딤돌이자 '남미의 맹주'를 향한 발걸음을 빠르게 하는 동력이다.

차베스가 틈만 나면 "부시 대통령은 전쟁광"이라며 대놓고 비난하며 법을 바꿔 미국을 '제1의 적국'으로 규정한 것도 바로 이런 자신감과 오일머니의 발로다.

분위기만 보면 베네수엘라에서 외국기업이 장사하는 건 어째 으스스하다.

실상은 다르다.

카라카스시내엔 맥도날드 버거킹 마크로 등 외국 소매점이 널려 있다.

모빌 등 미국 주유소도 많다.

오랫동안 독과점을 유지해왔던 카라카스전력회사와 엠프레사스 폴라(음료수 등 생필품 회사),칸티베(통신회사) 등도 건재하다.

오일달러를 노린 비즈니스가 강화되면서 정치적 긴장관계와 달리 미국과 베네수엘라 간 경제 교류는 오히려 활발해지고 있다.

2003년만 해도 베네수엘라산 원유의 50.3%만 미국으로 수출됐으나 작년엔 79.9%가 미국행 배를 탔을 정도다.

"베네수엘라가 원유수출로 벌어들이는 500억달러 중 70%가량을 미국이 다시 가져가고 있을 것"이라는 게 박찬길 KOTRA 카라카스 무역관장의 추정이다.

박 관장은 "베네수엘라 정부와 공기업들은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대규모 공공사업을 위한 발주를 실시하고 있다"며 "특히 의도적으로 미국 및 유럽기업을 배제하고 있어 기술력 및 가격경쟁력을 갖춘 데다 이미지도 좋은 한국기업으로선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자원을 무기로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과거로 가는 열차'에 올라탄 베네수엘라지만 경제적으론 상당한 기회의 땅이라는 얘기다.

카라카스(베네수엘라)=하영춘 특파원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