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철 <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장 jcoh@kcta.or.kr >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로 시작되는 50년대 가요 '봄날은 간다'는 필자가 이맘때쯤 즐겨 부르는 노래다.

손로원 선생이 쓴 이 노랫말은 중국 남북조시대의 악부시에 나오는 "봄바람 더욱 다정하여 나의 비단 치마를 불어 젖히네"하는 구절을 연상케 한다.

도입부의 애절한 트럼펫 소리와 함께 박시춘 선생이 붙인 서러운 멜로디를 들을 때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찡해진다.

피천득 선생은 40세쯤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필에서 "잃었던 젊음을 다시 가져보게 하는 봄은 헤어졌던 애인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라 했고,롱펠로도 "처녀들이여,5월은 오래 머무르지 않으니 마음껏 젊음을 누려라. 청춘의 향기를 마음껏 사랑하라"고 노래함으로써 봄을 찬미했다.

그러나 장년기에 들어선 탓인지,봄을 맞이하는 설레임과 기쁨을 표현하는 글보다 봄을 떠나 보내는 아쉬움과 서글픔을 노래하는 시수가 더욱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인지 "봄을 붙잡으려 하나 머무르지 않으니,봄이 가고 나면 사람도 쓸쓸해지네 (留春 春不住,春歸 人寂寞)"라고 한 백거이의 심정이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봄을 보낼 때마다 20여년 전,직장의 상사가 한강변에 흐드러지게 핀 봄꽃을 차창 밖으로 보면서 "앞으로 우리가 이런 모습을 몇 번이나 볼 수 있다고 생각하나?"라고 묻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 분은 몇 년 지나지 않아 병을 얻은 후 한창 일할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인생은 덧없고 봄이 결코 길지 않음을 그때처럼 실감한 적이 없다.

그 이후 언제부터인가 봄이 허망할 정도로 부쩍 짧아진 것을 느끼고 있다. 마치 봄을 도둑맞은 기분이다. 봄은 내 곁에 오래 머무르는가 싶더니 금세 토라져버린 애인처럼 휙 돌아서서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저만치 달아나 버린다.

서울의 경우,3월 평균 기온이 섭씨 5도,4월은 12도,5월이 17도 정도라고 하는데,5월 하순부터 첫 더위가 오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봄다운 좋은 계절은 4월 중순에서 5월 중순 사이의 한 달 정도가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지금은 필시 소동파가 천금의 가치가 있다고 했던 봄의 끝자락에 와있는 셈이다.

이렇게 봄날은 속절없이 가고,사람은 부질없이 나이 들어 가지만 내년에도 봄은 어김없이 우리 곁에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꽃잎이 지는 것을 그리 애석하게 여길 일만도 아닌 성 싶다.

내년 봄에는 나도 피천득 선생처럼 녹슨 심장에서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면서 봄에 감격하고 봄을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다.

황금찬 시인이 노래한 "미루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리듯,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달,5월",그렇게 봄날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