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리즈를 준비하면서 만난 한 중소기업인은 최근 '다 쓰고 죽어라(Die Broke)'란 책을 다시 꺼내 읽고 있다고 했다.

미국의 유명 경제저널리스트인 스테판 M 폴란이 쓴 이 책은 몇 년 전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의 내용은 "돈이란 살아 있는 동안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하며 죽은 후에 자녀에게 줘서 상속세로 지출되도록 하는 것은 자신과 자녀 모두에게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물론 이 책을 쓴 폴란의 진의는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쳐다볼 필요가 있으며 맹목적인 저축이나 안정성 위주의 노후 설계가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생과 재산을 흥청망청 탕진하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최근 중소 제조업체를 중심으로 국내 산업계에 극단적 의미의 '다이 브로크' 풍조가 고개를 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위험을 감수하고 기업을 키우려는 도전 정신보다는 기업의 단기 실적을 개인적으로 향유하려는 경향이 퍼지고 있는 것.이 같은 위험한 풍조의 밑바닥에는 '기업하기 힘든 환경'이 크게 자리잡고 있지만 '무거운 상속세 부담'도 한몫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자부품을 생산하고 있는 중소기업 사장 A씨는 2000년 수원에 있던 사업장을 충남 천안으로 옮긴 이후 무척 고전하고 있다.

원재료값 폭등과 환율 하락 등으로 흑자를 내기가 빠듯한 상황이다.

A사장이 악전고투 속에서도 기업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회사를 유지해 아들에게 넘겨주겠다는 일념에서다.

그런 A씨가 최근 충남 지역 땅값 급등으로 공장 부지 값이 크게 오르자 고민에 빠졌다.

땅값이 올라 회사의 자산 가치가 크게 높아졌기 때문.당연히 상속·증여세 부담도 커졌다.

회사를 물려주는 대신 회사 자산을 정리해 금융 자산으로 바꾸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목돈을 쥘 뿐만 아니라 서울 요지에 상가 몇 채를 사들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가업(家業)을 더 키워 아들에게 물려주는 걸 인생의 최대 목표라고 생각해 왔지만 엄청난 세금을 생각하면 그게 정말 나와 내 아들을 위해 좋은 일인지 다시 계산기를 두드리게 된다"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속내를 털어놨다.

A씨는 "그동안 국산 차만을 고집하던 주위의 친한 중소기업 사장들이 최근 들어 비싼 수입차를 구입하고 여행이 잦아지면 '회사를 정리하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예감은 대부분 적중했단다.

부산의 조선장비업체 사장 B씨(57)는 올해 내 중국에 생산기지를 마련한다는 계획을 접었다.

회사 발전을 위해 5년 전부터 준비해 온 청사진이었지만 위험 요인이 너무 크다는 판단에서였다.

"장남이 벌써 서른이 됐는데 일을 잘못 벌였다가 망하면 안 되잖아요.

지금 같은 상속세 체계하에서는 도저히 모험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B씨는 대신 올해부터 배당성향(배당금/당기 순이익)을 100%로 높이기로 했다.

또 그동안 사내에 축적해 온 50억원 상당의 유보금도 부동산이나 해외 펀드 등에 투자하기 위해 재테크 전문가들과 상담을 벌이고 있다.

"배당을 많이 받아놓을수록 나중에 상속·증여세 부담이 줄어든다고 하더군요.

늘어난 배당금으로 수익률이 높은 금융상품에 투자도 하고 남들처럼 골프장 회원권도 몇 개 사두려고 합니다."

이런 B씨도 다른 경쟁업체들이 새로운 시설을 들여오고 영업을 확장하는 것을 볼 때마다 밤잠을 설치며 갈등을 겪는다고 한다.

하지만 "힘들게 사업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가업으로 자식들에게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는데 그저 현상이나 유지하면서 편하게 살았으면 한다"고 솔직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