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뭐하는 겁니까.

우리 회사를 음해하기 위해 사정기관에 투서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똑바로 챙겨보세요.

내가 외부에서 이런 얘길 들어야 합니까?"

S사 기획담당 K상무(51).20년 직장생활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달 중순 그룹 회장으로부터 '정보 부재'라는 질책을 받은 이후 수면제와 소화제는 상비약이 됐다.

K상무는 곧바로 기획실 직원들을 풀가동,보름여 만에 사내 일부 부조리를 담은 투서들이 과장된 형태로 사정기관에 날아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즉시 회장에게 보고했다.

K상무는 "내가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인데 회장은 오죽하겠느냐"며 "지금도 협력업체 가운데 투서 당사자로 지목되고 있는 한곳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L사 L사장(58)은 요즘 수면제를 두 알씩 먹지 않으면 잠을 못 이룬다고 한다.

곧 세무조사가 시작된다는 첩보에서부터 '다음 검찰수사 대상은 L사'라는 출처 불명의 괴소문까지 나돌고 있어서다.

이 회사가 최근 공격적으로 추진했던 한 기업 인수전에서 막판에 발을 뺀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사세 확장보다는 내부 단속이 급선무라는 판단에서다.

L사 관계자는 "'우리 회사를 모함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라'는 지시가 전 직원에게 내려왔다"고 말했다.

'한국 기업에 바람 잘 날은 없는 것인가.' 기업들이 유례없는 경영 외적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환율,고유가요? 그건 스트레스도 아닙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대기업을 상대로 쉴새없이 진행되는 검찰조사와 세무조사는 그 자체만으로 모든 기업엔 스트레스다.

여기에 협력업체는 어느덧 가장 신경써가며 챙겨야 하는 대상이 돼버렸다.

'적대적 인수·합병(M&A)' 위협에 대한 대책은 스트레스 수준을 넘어 '생존의 문제'가 됐다.

H사는 M&A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지난주부터 준(準)전시상태에 돌입했다.

이 회사 경영진은 "기업의 생존이 걸린 문제여서 최소한 6개월간 '경영'보다는 '경영권 방어'에 올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 사태를 지켜보면서 기업들은 내부 단속을 잘못하면 '끝장'이라는 교훈(?)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최근 재계에서는 '자기 사람'이라고 여겼던 임원들조차 언제 돌아설지 모른다며 애사심과 충성심을 점검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전경련 관계자는 "현 정부 들어 우리 기업들이 세계시장으로 더욱 빠르게 뻗어나가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럴수록 국내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강도는 커지고 있다"면서 "이런 불필요한 스트레스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경영활동엔 심각한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요즘 가장 행복한 CEO가 누군지 아세요.

다른 걱정없이 경영에만 신경쓸 수 있는 사람이지요"라고 말하는 기업인들이 늘어가고 있다.

류시훈 기자 bad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