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사회가 전략물자 수출통제의 수위를 대폭 높이고 있다.

핵·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로 전용될 수 있는 각종 물자의 불법 수출을 차단하지 않는 한 언제라도 제2의 9·11테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다.

한국 기업들은 그러나 대기업들조차 자신이 수출하는 제품이 통제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아 곳곳에서 문제가 빚어지고 있다.

한국은 아직 전략물자 수출통제의 '룰'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나라로 인식되고 있다.

유엔은 오는 28일 전 세계 각국의 전략물자 통제시스템에 대한 보고서를 낸다.

결과에 따라 국내 기업들에 적지 않은 파장이 우려된다.

미국 위성TV업체인 다이렉트TV의 전신인 휴즈일렉트로닉스(Hughes Electronics).2004년 초 이 회사에 미국 국무부 조사관들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2003년 중국에 VSAT(위성 음성 및 데이터 전송장비)를 수출한 것이 국제무기거래규정을 위반했다는 혐의였다.

중국 군대가 이 장비를 개조해 군 현대화에 활용하려 했다고 미 국무부는 판단했다.

휴즈 일렉트로닉스는 미국 정부에 3200만달러의 벌금을 물고 3년간 특별감사관을 두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파산을 면할 수 있었다.

국내 Y사는 지난해 말 중국에서 25t의 산성플루오르화칼륨을 들여와 부산항에 환적한 뒤 허가 없이 이란에 수출을 기도했다.

화학무기로 전용될 수 있는 이 물품을 실은 배가 싱가포르항에서 정박 중 국제기구정보망에 포착됐다.

제품은 한국으로 반송되고 이 업체는 검찰에 고발됐다.

전략물자의 수출입 행위 자체도 1년간 금지됐다.

전략물자를 정부의 허가 없이 해외로 내보냈다가 적발된 미국과 우리의 여러 사례 중 하나다.

이전까지는 허가서를 받지 않고 전략물자를 반출해도 대부분 정부가 눈감아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관용이 통하지 않는다.

변화는 미국이 주도하고 있다.

세계무역센터 테러로 6000명 이상이 사망하는 모습을 지켜본 미국은 전략물자의 국제유통을 엄격히 통제하는 것만이 테러를 방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시리아 이란 이라크 리비아 수단 쿠바 북한 등 7개국을 테러지원국가로 지정하고 이들 국가에 전략물자가 흘러들어가는 것을 엄격히 감시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중국 일본 등 미국과 더불어 세계무역을 좌우하는 국가들은 이 같은 미국의 행보를 따라가고 있다.

EU는 이르면 올 하반기부터 전략물자 통제규정을 준수하는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에 대해 차별대우하겠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중국도 미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중국 당국은 지난해 7월 톈진항에 정박해 있는 인도 국적의 무역선을 본국으로 강제소환했다.

북한으로 향하던 이 배에 청화소다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 발 더 나아가 아시아의 단일화된 통제시스템을 구축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 기업들이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산업자원부가 2004년 말 1200개 업체를 대상으로 실사한 실태조사에서 70개 업체가 전략물자를 정부 허가 없이 불법수출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산자부 관계자는 "70개 업체 중에는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대기업도 일부 포함돼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한국갤럽이 168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표본조사에선 자신들의 수출 제품이 전략물자에 해당되는지를 따져보는 업체가 29%에 불과했다.

나머지 71%는 이런 제도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전략물자 여부를 확인하는 29%의 기업 중 실제 정부로부터 수출절차를 밟는 기업은 7.8%에 그쳤다.

우리 기업들의 무지 내지 무관심은 국제 평가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미국 국제무역안보센터(CITS)가 실시한 각국 수출통제체제 분석에서 한국은 중국 쿠바와 같은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준동 기자 jdpow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