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습용 재료 같은 사내와 여자가


나란히 검은 주유기를 제 옆구리에 꽂고 서 있다


그들은 서울의 밤이 꿈 대신에 선택한 텍스트이다


허공의 미터기에서 그들의 몸까지는


부패한 내장 같은 검은 호수가 늘어졌고


주유기의 금속성 손잡이는 옆구리 앞에서 멈추었다


그들은 두 발을 각각 흰 정지선 앞에 멈추었다


오아시스 같은 붉은 간판은 허공에 있다


(…)


밤의 표면은 접시처럼 미끄럽고 불안하다


서울은 텍스트인 사내와 여자를


퓨즈처럼 갈아끼우기 시작한다


밤의 흐린 불 속에


공기가 철근처럼 삐죽삐죽 뽑혀져 있다


이원 '서울의 밤 그리고 주유소'부분




지독하게 음울한 풍경이지만 잘 들여다 보면


바로 우리가 사는 공간이다.


차는 물론이고


집도 건물도 은행도 상점도 온통 '기름'으로


작동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실습용 재료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서울 같은 거대도시에서 기름,또는 전기가 없으면 생존하는 게 쉽지 않을 테니까.


세상의 텍스트는 바로 '우리'지만 '우리'는 어느새 퓨즈처럼 간단하게 갈아끼워질 수도 있는 슬픈 존재가 돼 버렸다.


주객이 전도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셈이다.


이정환 문화부장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