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쫓기듯' 출국해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체류한 지 꼭 5개월만에 귀국했지만 그간 그의 행적은 대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삼성그룹측은 이 회장이 미국에서 페암수술 후유증 진단과 치료, 요양 등으로 시간을 보내다 지난해 연말께 일본으로 거처를 옮겨 도쿄(東京) 등지에서 지인들과 약속된 만남을 갖는 등 사적인 활동을 벌였다고 밝혔으나 어느 것 하나 객관적으로 확인된 내용은 없다. 삼성그룹이 이 회장의 구체적인 행선지와 귀국계획에 대해 함구로 일관한 가운데 삼성 안팎의 중대행사 등 계기가 있을 때마다 귀국설이 나돌았지만 번번히 무산됐고 그의 해외체류가 장기화하면서 건강이나 향후 행보에 대해 구구한 추측이 나돌기도 했다. 이 회장이 김포공항에서 도쿄를 경유해 미국으로 출국한 것은 지난해 9월4일로 옛 안기부 직원의 도청 테이프를 통해 삼성의 불법 정치자금 제공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 삼성과 이 회장을 상대로 검찰이 수사를 벌여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 후 국회 국정감사에 나선 국회의 몇몇 상임위원회는 이 회장의 출석을 요구했으나 이 회장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이에 응하지 않았다. 정치권과 사회 일각에서 '반(反) 삼성 여론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여당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정치권에서는 금융산업구조개선법(금산법) 개정 등 삼성의 지배구조 타파 또는 대혁신을 겨냥한 압박도 본격화됐으나 삼성그룹이나 이 회장은 대응다운 대응을 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편치않은' 생활을 이어가던 이 회장은 지난해 11월19일에는 막내딸 윤형씨 (당시 26세)를 잃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이 회장의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졌을 것이라는 추측은 있었지만 삼성은 그의 건강이나 동정에 관해 더욱 굳게 입을 닫았다. 이 회장의 귀국에 대한 추측이 처음으로 강하게 제기된 것은 지난해 12월22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중소기업 상생회의'를 앞두고서였다. 국내의 주요 경제인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고위 관리들과 대기업-중소기업간 협력을 논하는 중요한 행사인만큼 이 회장이 외면하기 어렵고 이 자리에서 획기적인 중소기업 대책을 발표한다면 귀국 '모양새'도 갖출 수 있지 않느냐는 추측이 설득력을 얻었다. 그러나 이 회장은 귀국하지 않았고 때마침 정부 고위 관리의 입을 통해 '건강악화설'이 제기됐으나 삼성의 진화 노력으로 크게 확산되지는 않았다. 그룹 신년 하례식과 '자랑스런 삼성인상' 시상식 등 삼성안팎의 중요 행사가 몰려 있는 연말, 연시를 앞두고 또다시 이 회장의 귀국설이 나돌았지만 불발에 그친 것은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2월8일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개막되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를 앞두고 이 회장이 이 회의만큼은 참석할 것이며 일본에서 곧바로 이탈리아로 날아가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점을 들어 그 이전에 잠시 귀국할 것이라는 예측이 대두했지만 삼성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삼성은 3일 오후가 돼서야 'IOC 총회 불참' 가능성을 내비쳤으나 귀국 가능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결과론이지만 이 회장과 삼성은 이미 이 때 귀국방침을 정하고 '안전귀환'을 위한 세부사항들을 검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전격적인' 귀국을 통해 반 삼성 세력의 공항 시위 등 삼성 관계자들이 우려해 왔던 사태없이 이 회장은 무사히 한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5개월간 이 회장의 해외 체류는 '은둔하는 경영인'이라는 그의 이미지를 더욱 고착화했고 이 회장의 신변이나 귀국여부를 둘러싼 엇갈린 이야기들은 삼성이 '뭔가 비밀스럽고 꾸밈이 많은' 기업집단이라는 선입견을 강화시킨 계기가 됐다고 많은 재계 관계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cwhyn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