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 지나가면 나무 안에 숨어있던 글자와 그림이 모습을 드러낸다. 온 정신을 칼 끝에 모아 한 자 한 자 새겨내는 작업,서각(書刻)이다. 서각을 20여년 간 수행의 방편으로 삼아온 혜안 스님(46)이 그 동안 새긴 글씨와 그림을 선보이는 자리를 마련한다. 오는 9~18일 서울 사간동 법련사 불일미술관에서 열리는 '一劃一刻(일획일각)-혜안스님 불교서각전'이다.


"금강경 6700자를 병풍으로 만들다가 거의 완성될 무렵 두 글자가 떨어지는 바람에 허사가 된 적이 있어요. 서각은 그만큼 정성을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뭇결 하나라도 거스르면 글자가 어긋나버리거든요."


혜안 스님이 이번 전시회에 선보이는 작품은 150여점.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똑같은 모양과 크기로 재현한 금강경 경판들,앞면에는 반야심경을 새기고 뒷면에는 한국화를 새긴 8폭 나무 병풍,12지신도와 와당문양,연꽃무늬 등 불교 전통문양을 새긴 판화와 화서(畵書刻),글씨를 새긴 죽비 등 다양한 형태의 서각과 판화를 내놓는다. 물푸레나무로 주먹만한 염주알을 깎은 다음 각 염주알마다 6자씩 반야심경을 새겨넣은 108염주도 있다.


1973년 월정사로 출가한 혜안 스님이 서각을 시작한 것은 1982년부터. 가난했던 시절 "신도들 주머니에서 돈 뺏지 않고 혼자 살 수 있도록 기술 하나씩은 익히라"는 은사 스님의 당부를 마음에 담고 있다가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을 보고 서각을 결심했다고 한다. 당시 해인사에 있던 노스님한테 2년간 서각을 배웠다. "한 글자씩 새길 때마다 온 정신을 집중하고 정성을 다 해야 글자들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혜안 스님은 설명한다.


"예전에는 작은 절에서도 직접 경판을 새겨서 경전을 찍었어요. 절의 주련이나 현판 등 기본적인 불사는 스님이 직접 할 줄 알아야 하는 데 현실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팔만대장경을 보면서도 서각은 주목하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지요."


혜안 스님은 전시회에 앞서 그동안 서각을 하는 틈틈이 썼던 마음공부 이야기를 묶어 '그래,떠나보거라'(열린박물관)라는 책도 냈다. 일상의 모든 일에서 마음을 버리고,다스리고,찾는 수행자의 생각이 담겨있다.


서각을 어떤 눈으로 봐야 하느냐는 질문에 혜안 스님은 "그냥 새겼으니,그냥 보세요"라고 말했다. 빈 마음으로 새겼으니 빈 마음으로 보라는 뜻일까.


서화동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