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내에서 구조조정 기업 매각에 대한 속도조절론이 나오는 표면적인 이유는 대형 기업들이 잇따라 시장에 쏟아져 나오면서 공급이 수요를 초과,제 값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매각 대상이 우리금융지주 대우조선 하이닉스 등 한국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기업이라는 점도 신중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정부가 기업 매각에 대한 속도조절뿐 아니라 전반적인 방향에 대한 재검토 작업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우량 기업 매물 홍수 인수합병(M&A)업계는 올해 시장에 나올 대기업이 최대 10여개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었다. 구조조정을 통해 알짜 회사로 거듭난 대우계열사와 현대건설 하이닉스,그리고 외환은행 우리금융지주 LG카드 등의 명단이 나돌았다. 이들 기업의 시가총액 규모만도 약 70조원에 달한다. 여기에 교보생명 대한생명 등 정부가 팔아야 하는 비상장 주식까지 합치면 100조원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이 매물이 1~2년 새 쏟아지면 시장은 당연히 원매자 중심,즉 바이어스마켓(buyer's market)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게 된다. 아무리 국내에서 부동자금이 넘쳐나도 작년 진로 대우종합기계 등을 매각할 때와 같은 경영권 프리미엄은 생각하기 힘든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 영향력 아래 있는 산업은행은 현대건설 등의 매각시기를 조절해야 한다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외환은행은 당초 현대건설의 워크아웃을 이달 내 졸업시키고 대우건설 매각이 마무리되는 2월께 매각작업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산은이 현대건설 매각과 관련해 구성하게 될 주주협의회 운영 방식을 두고 이견을 제기해 워크아웃 조기졸업이 무산돼 매각은 상당기간 늦춰지게 됐다. 외환은행은 현대건설을 조기에 매각하고 싶어 하지만 산은은 대우건설 등 다른 매물과 겹치지 않도록 매각 시기를 조절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산은은 "외환은행을 견제할 장치가 필요하다"고 밝혀 양대 채권자의 이견은 쉽게 봉합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LG카드도 당초 LG브랜드 무상사용 시한인 오는 3월 말까지 매각할 계획이었지만 현재로선 3월에야 매각 공고를 낼 수 있는 상황이어서 최소 6개월 이상 늦어질 가능성이 높다.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가 직접 "매각이 다소 늦어질 수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산업정책적 판단이 주요 변수로 우리금융 하이닉스 대우조선 등은 정부가 전체 산업구조를 감안해 매각시기나 대상을 조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부 내에서 힘을 얻고 있다. 우리금융은 금융지주회사법에 2007년 3월(공적자금관리위원회 동의시 1년 연장 가능)까지 매각을 완료하도록 돼 있지만 국내 자본이 지배하는 은행은 우리금융만 남은 상태여서 매각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정경제부 관계자는 "주가 상승으로 매각 가격이 높아져 마땅한 매수 희망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서 매각 시기에 쫓기게 되면 우리금융지주를 헐값에 팔거나 외국 투기자본에 넘기는 사태가 초래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우리금융이 산업은행과 함께 기업금융 시장을 사실상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 매각신중론은 설득력을 얻고 있는 분위기다. 이에 따라 예금보험공사는 올해 지분 78% 중 경영권이 넘어가는 51%를 뺀 나머지 지분을 블록세일 등을 통해 매각하는 데 치중할 계획이다. 정부도 우리금융지주를 2007년 3월까지 팔도록 규정하고 있는 금융지주회사법을 개정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우조선은 산업은행이 사실상 매각을 장기과제로 돌려놓고 있다. 지금 시장에 내놓아야 국내업체에선 유럽계 등의 견제로 사갈 수 없고 결국 중국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대우조선을 중국에 넘길 경우 이는 바로 국내산업에 대한 타격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하이닉스의 경우 채권단은 올 하반기부터 매각 작업에 들어가 내년까지 매각할 계획이지만 적당한 원매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시한이 상당기간 늦춰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매각 속도조절론에 대한 반론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지분을 오래 갖고 있을 경우 낙하산 인사와 공기업화에 따른 비효율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용준·김현석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