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포럼] 이땅의 아버지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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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의 언론 보도 가운데 흥미로운 게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한국 남편들이 아내 없는 집에서 혼자 생활할 수 있는 자립지수 평균이 57.9라는 것과 영국에선 딸 가진 부모의 좌파 성향이 높다는 것이었죠.하원의 여성의원 127명 중 17명만 보수당이라는 내용도 포함됐더군요.
안타깝고 착잡했습니다.
두 기사는 전혀 별개의 사안인 듯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둘 다 여성문제와 연결돼 있고 우리 사회의 현안인 출산율 저하와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니까요.
영국 부모들이 그렇다면 남편 자립지수가 57.9에 불과하다는 우리나라의 딸 가진 부모들은 어떨까요.
"무슨 소리냐,딸을 낳는다고 왜 좌파가 돼? 영국은 이상하구만" 혹은 "요즘 우리나라가 얼마나 여자들 천국인데 그래" 하실는지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국내에선 근래 여풍(女風)이 거세다고 야단이니까요.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늘어난 건 틀림없습니다.
실제 지난해 행정고시에선 44%,사법시험에선 32.37%,서울시 공무원 임용시험(행정직)에선 66.2%가 여성이었구요.
기업의 여성 채용도 과거에 비하면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여성들의 능력 발현 기회가 늘어나면서 딸이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성공하기를 바라는 아버지들도 크게 증가했습니다.
딸이 사회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외손자를 키워주겠다는 아버지도 적지 않습니다.
똑똑한 딸이 좀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해외에 유학 보내놓고 자신은 외식 한번 못하는 아버지도 많습니다.
이런 아버지를 볼 때면 부럽고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나 때로 마음이 어두워질 때도 있습니다.
부녀의 이상(理想)과 딸들에게 닥칠 현실 사이의 괴리가 보이니까요.
딸은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아버지들이 직장의 부하 여직원에겐 다른 모습을 보이는 수도 적지 않습니다.
집에선 베란다에 나가서 피우는 담배를 사무실에선 버젓이 피우는가 하면 여직원들을 회식이라는 이름으로 밤 늦게까지 붙들어두는 수도 흔합니다.
"직장생활을 하자면 회식이야 당연한 거고 담배도 피울 수 있지,그렇게 일일이 따지면 불편해서 어떻게 여자를 뽑아" 하실는지요.
그러나 간접 흡연은 직접 흡연 이상으로 해롭고 특히 임신 초기엔 한잔의 술과 약간의 니코틴도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담배와 술은 약과지요.
그런 문제에선 여성을 배려하지 않으면서 업무에선 "여자니까 야근 시키기도 나쁘고" 등의 이유를 내세워 본인에게 묻지 않고 남녀의 일을 구분하는 수도 흔합니다.
경쟁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여자라고 신경써줘야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딸과 남의 딸을 다른 잣대로 재는 태도가 여성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기회를 갖고 능력을 발휘하자면 결혼을 하지 말거나 해도 아이를 낳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태를 부르는 건 아닌지 궁금합니다.
현실이 이런데 출산율이 낮아 큰 일이니 애를 낳으라는 얘기에 어느 누가 수긍할는지요.
이대로 가면 외손자고 친손자고 안아보기 어려울지 모릅니다.
딸과 며느리 할것 없이 일하느라 아이 갖기를 두려워할 테니까요. 출산보조금 얼마를 준다고 키우기 힘든 아이를 낳을 턱도 없습니다. 그래도 계속 내 딸과 남의 딸은 다르다고 생각하고 행동하실 건지요.
박성희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