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시가 기업의 자금조달 창구 기능을 잃고 거꾸로 기업 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바뀌고 있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주주이익 극대화'에 나선 결과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적대적 M&A(인수·합병)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측면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우량 기업들이 마음놓고 본연의 경영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적대적 M&A에 대한 방어 장치를 마련해주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주주환원에 '등골이 휜다' 상장기업들이 올 들어 9월 말까지 자사주 취득이나 배당을 통해 주주들에게 환원한 금액은 무려 14조6132억원이다. 지난해 상장기업 전체 순이익(51조1906억원)의 29%에 달한다. 시가총액 1위인 삼성전자만 하더라도 올해 배당으로 1조6404억원(연말배당+중간배당),자사주 취득으로 2조1419억원을 투입했다. 지난해 순이익(10조7867억원)의 35%에 달하는 3조7823억원을 주주환원에 쓴 셈이다. 이에 반해 주식시장에서 새로 조달한 자금은 한 푼도 없다. KT도 작년 순이익(1조2555억원)의 67%에 달하는 8429억원을 현금배당에 나눠줬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의 주주환원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정작 기업에 필요한 투자가 뒷전으로 밀리거나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도 단기적인 주주환원에 급급한 나머지 우리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훼손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막대한 주주환원이 해당 기업의 주가에 도움이 되는지도 논란거리다. 당장은 주주환원이 주가 하락을 막는 버팀목 역할을 하겠지만 주가를 끌어올리기엔 '2% 부족하다'는 것이다. 대표적 고배당주로 꼽히는 SK텔레콤 KT 등 통신주의 주가가 올해 증시 활황에도 불구하고 거의 제자리 걸음을 한 게 대표적 사례다. 결국 성장 없는 주주환원은 주주들에게도 별 도움이 안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자본시장 제자리 찾기 시급 그런데도 기업들이 이처럼 주주환원에 적극적인 것은 그만큼 지배구조가 취약하기 때문이란 게 증권업계의 분석이다. 예컨대 삼성전자는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 지분이 16.1%에 불과하다. 이에 반해 외국인 지분은 54%에 육박한다. 여기다 정부가 삼성생명 등 금융 계열사 보유지분에 대해 의결권 제한을 추진하고 있어 경영권 방어를 위한 우호세력을 찾기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SK그룹의 간판회사인 SK㈜는 한때 소버린자산운용과 경영권을 놓고 표 대결까지 벌이기도 했다. 국민은행 포스코 현대차 KT 등 웬만한 국내 대표기업들도 외국인 지분이 46~85%에 달한다. 당장 경영권 위협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주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최대주주의 지분이 매우 높아 경영권이 안정된 롯데그룹 등은 대체로 자사주 매입이나 현금배당에 소극적이란 데 주목해야 한다"며 "결국 주주환원에 적극적인 기업은 지배구조가 그만큼 취약하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오너십이 약할수록 투자에 따르는 리스크(위험)를 떠안기 힘들기 때문에 당장 주주들이 선호하는 주주환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과도한 주주간섭을 피해 제발로 증시를 떠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실제 자진 상장폐지 기업은 2000~2003년 매년 1~2개에서 지난해 6개로 늘어난 데 이어 올해도 이미 제일은행 산은캐피탈 신동방CP 세원화성 이수세라믹 피케이엘 등 6개사가 증시를 떠났다. 한국투자파트너스도 자진 상장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금융감독원과 증권선물거래소가 우량 기업 상장을 통해 시장의 덩치를 키우겠다는 장밋빛 계획을 내놓고 있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상장유지 비용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자본시장이 제 역할을 해 신성장 산업에 자금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며 "과도한 경영간섭을 막고 투자를 활성화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