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주 < 서강대 명예교수·경제학 > 엊그제 세계무역기구(WTO) 쌀시장 개방에 관한 비준동의안이 어렵게 통과됐다.의장석 점거를 노리는 반대파 의원들을 들어내는 몸싸움을 치른끝에 표결이 이뤄졌다. 한국이 2014년까지 쌀시장 완전개방을 유예 받는 대신,쌀 수입 물량을 올해부터 조금씩 증가시킨다는 내용이다. 즉 기준연도(1988~90) 평균소비량의 4%(22만5000t)에서 2014년의 7.96%(40만8700t)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늘려 수입하게 됐다. 향후 이를 수입하는 수입물량 소비 문제와 대금조달 문제가 남아있다. 국내생산 쌀도 전량 소비하지 못하고 창고에 쌓아 썩히는 물량이 매년 늘고 있는데 외국 쌀이 밀려들어오게 됐다. 보다 나은 대안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관세화하는 대안이 있었다. 고율(예컨대 400%)의 관세를 적용해 수입쌀의 국내가격 경쟁력을 약화시키면 수입 홍수가 크게 조절된다. 그 후 목표연도까지 관세율을 점진적으로 내려 국내 농업 구조를 조정하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지금대로면 2014년에 가서 다시 한 차례 시장개방반대 진통이 예정돼 있다. 한국 농업은 어떤 위치에 있나? 8%의 인구가 국내총생산의 4% 미만을 생산한다. '4%' 속에는 농업뿐 아니라 임업ㆍ어업부문이 생산하는 부가가치가 포함되고,국제시세보다 4배 이상 비싼 국내시장가격으로 평가한 쌀의 부가가치가 포함돼 있다. 국제가격으로 따진다면 '4%'는 절반 이상 줄어든다. 국민의 90% 이상이 비농업부문에 종사한다. 이들 대다수 국민의 경제적 후생은 생계비를 낮추는 낮은 쌀값과 정비례한다. 금번 비준안 국회통과 저지를 시도한 민주노동당은 무엇을 겨냥했나? 노동자의 생계비를 낮추는 쌀시장 개방에 왜 반대하나? 농민도 노동자란 시각에서 보더라도 숫자적으로 우세한 노동자 이익에 배치된다. 신흥 개도국 상품에 밀려 임금이 깎이고 실직을 우려하게 된 선진국 노동자들의 반세계화 몸부림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그런 궁지로 몰고 간 장본인의 하나인 한국의 노동자들이라면 세계화 찬성 시위를 벌여야 마땅하다. "만국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인가? 한편 농민들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금할 수 없다. 진정 농민과 농촌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가?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궤도를 달려온 한국이 농업부문 구조조정에 손 걷고 나설 때가 지난 지 오랜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자금지원 확대가 능사는 아니다. 현행 영농방식을 그대로 두고 과거처럼 거액의 자금을 농촌에 투입해도 갈라진 마른 논밭에 물동이로 물붓기가 된다. 도시인들이 외국산을 마다하고 즐겨 먹어줄 고품질 쌀, 환경을 고려한 유기농 쌀을 개발하는 등 과학영농이 정답이다. 그러고도 남은 농토는 화훼단지화,휴농화,여가활용단지화 등으로 전용해야 한다. 찬성측 의원들이 언급한 후속조치가 과거 정권들처럼 수십조원의 자금살포 방식에 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 정치인들은 유권자 표에만 관심이 있다. 깨어있는 농민이라면 이 같은 정치 작태에 철퇴를 내릴 것이다. 깨어있는 농민은 현행방식의 농업에 미래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농민 및 비농민 유권자들은 비논리적 정서적으로 움직이는 핫바지로 보는 것이 정치꾼들의 눈이다. 오늘날 영농일손은 대부분 노인들 차지다. 이들은 자식들을 공부시키려 타향으로 떠나 보낸다. 제조업 서비스업 등 비농업 직장에 근무하는 자녀들이 이들이 사는 보람이다. 다시 귀향할 자녀들은 드물다. 귀여운 손자들은 피자에 입맛 들어있다. 이것이 한국농촌의 현주소다. 농민을 현재의 질곡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자신은 도시에 편히 살면서 농촌 사랑을 외치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는 위선자이며,정치적으로는 농민의 표를 노리는 절도범이다. 요즘 홍콩 등 국제회의 개최지까지 원정 가서 자유무역 반대시위를 펼치는 극성패가 있다. 세계 굴지의 교역국으로서 나라망신도 이만저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