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품보다는 신뢰를 판다.' PB들의 세계에선 불문율로 통하는 말이다. 부자 고객의 공통적인 특성은 금리 1%에 흔들리지 않으며 남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을 잘 믿지 못하는 부자들이 수수료까지 내면서 PB를 찾게 하려면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하다. 'PB서비스는 고객의 마음을 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자식은 못 믿어도 자네(PB)는 믿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고객과 친밀한 관계를 쌓아야 한다"는 게 PB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때문에 PB들은 고객의 신뢰를 사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부자들의 금융주치의'인 만큼 해박한 금융지식과 정보는 기본이다. 수시로 고객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은 물론 건강검진에 동행하고 고급 사치품 구입 등도 대행해준다. 휴일에도 고객의 다급한 호출을 받으면 바람처럼 달려와 민원을 해결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심지어 고객의 집에서 일할 믿을 만한 가정부를 알선해 주는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고객을 왕처럼 모신다. PB들 사이에서 '부자들의 집사'라는 자조섞인 자평이 나오는 것도 그래서다. 일단 고객의 신뢰를 얻으면 '가족'에 준하는 특별 대우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열을 잘 해주다가도 하나의 잘못으로 '신뢰'가 깨지면 그자리에서 '팽'(烹) 당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분당신도시에 위치한 모 은행 PB전문점 K지점장은 지난 여름 2시간 동안 PB 고객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했던 일을 잊지 못한다. 엔화스와프예금에 200억원을 예치해놓았던 한 고객이 국세청의 엔화스와프 예금에 대한 갑작스런 과세방침에 대해 "당국의 과세 방침을 미리 알고서도 과세를 안 한다고 속인 게 아니냐"며 "예금을 빼 다른 은행으로 옮기겠다"고 으름장을 놨기 때문이다. 그동안 부모처럼 모시며 '충성'을 다한 것을 생각하면 야속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올해 100억원의 수신 증대 목표가 떨어진 마당에 200억원이 한꺼번에 빠져 나간다면 '보따리'를 싸야 할 판이므로 바지 가랑이를 잡고 통사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화려해 보이는 PB 세계의 애환어린 단면이기도 하다. 유병연 기자 yoob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