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혜원 < 메트로뱅크 부지점장 marianneseok@yahoo.com > "누나는 달리기 잘 해?" 엘리베이터 안에서 체육복을 입은 초등학생이 함께 탄 여중생에게 물었다. "못해.꼴찌야." "그럼 항상 5등이겠구나." "아니,여덟 명씩 달릴 때도 있어." 아둔하게도 5등의 의미를 중학생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알았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늘 다섯 명씩 달리기를 하니까 꼴찌는 언제나 5등이었던 것이다. 말 속에서 느껴지는 천진함이 내 기분까지 신선하게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천진스럽게 말하는 사람이 어른이면 상황은 달라진다. 나라의 안살림을 맡고 있는 기관이 내무부였던 시절이다. 장관 이름은 잊었지만, 어느 신임 내무부장관 부인이 했던 말은 잊혀지지 않는다. 한 방송기자가 남편이 나라의 안살림을 책임지게 됨을 축하하며, 집안 살림을 맡고 있는 주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 마디를 부탁했다. "살림에도 지혜가 필요합니다. 요즘 배추가 금값이라고 아우성인데, 이럴 때는 배추가 비싸다고 한숨만 쉬지 말고 배추김치 대신 열무김치를 담글 줄 알아야 현명한 주부이지요." '콩나물 1000원어치, 두부 한 모를 사면서도 이리저리 따져보는 주부들에게 저런 말을 하다니.장을 보는 주부들의 모습을 본 적이나 있는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는 사람이 의식하지 못한 채 누군가를 비하할 때는 씁쓸한 기분이 든다. 금융시장의 전망에 관한 조찬세미나에서였다. 연사는 금융계에서 이름난 분이었다. "경제 위기 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두 경제박사가 되었어요. 예전에는 BIS 비율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요즘은 집에서 놀고 먹는 사람들까지도 알고 있다니까요." 주부를 '집에서 놀고 먹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의식이 엿보여서 기분이 언짢아졌다. '정책을 다루는 사람들이 화폐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노동을 놀고 먹는다고 본다면 경제적 수치로 잡히지 않는 복지 향상 등에는 관심이 없을 텐데.' 딴 생각을 하느라고 정작 세미나 내용은 머리 속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말의 힘은 그 말을 한 사람의 사회적인 위치가 높을수록 커진다. 심각한 경제난으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베르사유 궁전 앞에서 파리 시민들은 빵을 달라고 외쳤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는 철없이 말했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 파리 시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이 말은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결국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 요즘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는 말이 생각 날 때가 많다. 그래서 나야말로 두 달 동안 이 귀한 지면에서 쓸데없는 말만 하지 않았는지 은근히 걱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