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주 < 한국증권금융 사장 sjhong@ksfc.co.kr > 최근 회사 창립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제 컨퍼런스와 리셉션을 개최하면서 하객에 대한 답례품으로 정조대왕 때 만들어진 반차도(班次圖)를 선정했다. 반차도는 정조대왕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이하여 서울에서 화성으로 떠나는 1799명으로 구성된 대왕의 행차모습을 위풍당당하면서도 익살스럽게 묘사한 길이 15m의 대작이다. 이 그림은 김홍도와 문하생이 그린 것으로 왕조문화 절정기의 자신감,화려함,자유분방함을 보여주는 예술성 높은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사실 이 책을 선정한 것은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고 선조들의 철저한 기록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 반차도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원행을묘정리의궤'는 행차의 전말을 매우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한 예로 의궤에 기록된 음식의 종류와 만드는 방법을 그대로 따르면 지금도 아주 훌륭한 궁중식을 재현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정조시대 기록정신의 백미는 '화성성역의궤'라고 한다. 정조대왕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복권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야심차게 새로운 도읍인 화성을 건설하였다. 이때 공사 계획에서 진행 상황,결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자세히 기록했으며 필요한 경우에는 그림을 그려 이해를 돕기도 했다. 또한 공사에 쓰였던 각종 기계와 기구에 대한 제작방법과 용도 등을 빠짐 없이 적어둬 당시에 꽃 피웠던 실학정신과 높은 수준의 건축,공업을 엿볼 수 있다. 한영우 서울대 교수에 의하면 동시대인 18세기에 건설된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미국의 워싱턴 등에는 이렇게 자세한 설계도나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이런 우리 선조들의 철저한 기록정신과 함께 국책사업을 깨끗이 마무리 짓고 준공 보고서까지 완벽하게 펴낸 당시의 경영 및 관리능력에 감탄하고 자랑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후손으로서 이런 훌륭한 기록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한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중세 도제제도에 의해 전수되어 소수의 장인들만이 알고 있었던 지식과 기술을 18권의 백과전서로 집대성함으로써 보다 많은 사람에게 전파할 수 있게 되면서 산업이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한 시대의 지식과 경험이 기록이라는 과정을 통해 축적되고 확산되면서 사회발전이 이뤄진다고 볼 때 우리는 좋은 유산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잘 활용하지 못해 역사를 후퇴시켰던 경험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우리를 되돌아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