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현 식 <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 >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능력시험이 시행된 이래 올해는 24개국에서 2만7000여명이 응시했다고 한다. 고용허가제 시행으로 노동부가 주관하는 외국인 취업 희망자용 한국어 능력시험은 별도로 스리랑카 필리핀 태국에서 시행됐는데,2만4000여명이 응시해 아시아를 덮은 한국어 열기를 실감케 한다. 이는 한국 경제와 한류 문화에 힘입은 결과로 국력과 언어 가치는 정비례함을 보여준다. 이처럼 한국어가 세계인들로부터 대접을 받게 된 것을 조상들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세종대왕께 감사할 일이다. 세종은 발음기관의 형상을 본떠 자음자를 만들고 천지인(天地人)의 형상에서 모음자를 만드는 발상으로 한글을 창제해 고유 민족문화의 터전을 세웠다. 세계의 문자 학자들이 한글을 인류의 위대한 지혜의 소산이라고 격찬함도 당연하다. 이러한 한글은 용비어천가를 통해 장편 서사시로 태어나고 불경 번역으로 불교 전파의 도구로 쓰였다. 한문학의 위세 속에서도 정철 윤선도 등 사대부층이 시조,가사를 짓고 홍길동전 춘향전 등의 소설이 발달하며 여성의 내간체 문학으로 한글문학이 꽃피운다. 개화기에는 성경 번역이 나오고,교회에선 한글 강습을 해 문맹 퇴치와 민족 계몽에 기여하며,서재필은 독립신문의 한글체로 한글 대중화에 기여한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속에서 한글문화가 존속된 건 이육사,윤동주,청록파 시인들이나 민족 언론의 저항 덕분이었다. 국어문법 연구도 오늘에 이른 것은 일생을 국어 연구에 헌신한 주시경 선생 같은 선각자 덕분이다. 주시경의 정신을 받들어 결성된 조선어학회가 '한글맞춤법통일안'(1933)을 만들고 '조선말 큰 사전' 편찬사업을 추진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문인들이 변절하던 시절에 조선어학회원들은 1942년 10월 사상 불온자들로 체포돼 고문을 받고 이윤재,한징 선생은 옥사했으며 최현배,이희승,정태진 선생은 해방을 맞아 출옥했으니 이것이 조선어학회 사건이다. 총독부에 압수된 원고는 해방 후 되찾아 록펠러재단 후원으로 1947~1957년에 걸쳐 '조선말 큰 사전'(전6권)이 나오게 됐으니 이들이 아니었으면 우리가 사전 한 권 제대로 갖추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는 배우기 쉬운 한글 덕분에 문맹 퇴치와 높은 교육열이 가능했고, 이를 바탕으로 한강의 기적도 이룰 수 있었음을 깨달아야 한다.이제 컴퓨터,디지털 시대에 정보 집적도가 높은 한글은 조상들의 한자문화와 함께 더욱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우리는 외국어를 남용하고 욕설,비방이 넘치는 인터넷 언어 및 국적 불명의 상호와 상품 명칭을 만들어 국어와 문법을 파괴시키는 데 몰두하고 있다. 최근에는 학자들조차 국어교육과정을 개정하며 '문법' 영역을 제거하려는 움직임도 있어 국어의 미래가 걱정스럽다. 일부 경제인들 사이에서는 영어를 공용어로 해 국가경쟁력을 키우자는 의론도 있다. 여기에는 국가경쟁력을 위해서 국어 문화유산과 국어 공동체를 희생시켜도 좋다는 경제지상주의 논리가 깔려 있는데,영어를 공용어로 삼는 것이 결코 경제 발전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유럽과 일본이 영어권이 아님에도 선진국을 이뤘고 인도 케냐 필리핀처럼 영어권이라도 선진국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어가 중요해도 나라를 영어문화에 예속시키면서 얻어지는 경제성장이 무슨 삶의 의미를 줄 것인가. 국어를 바르게 써야 외국어 능력도 바르게 길러짐을 알고 국어 능력부터 제대로 기를 일이다. 한국어는 남북 7400만명,해외 560만명으로 8000만명 정도가 사용하는 세계 13위의 대국 언어다. 우리 교역 규모가 세계 12위,경제 규모(GDP)가 11위이므로 이제 한국어를 영어 같은 세계어로 발전시키는 일이야말로 우리 지도자들과 국민이 선진 한국을 창조하느냐의 여부를 가르는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