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쌀비준案 처리절차 논란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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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병 일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
한ㆍ칠레 FTA비준동의안 처리과정을 기억하는가? 2002년 10월,3년 반을 끌어오던 협상이 타결된 후 2003년 7월 비준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소관 상임위인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상정되는 데 4개월, 상임위 통과에 50여일,국회 본회의에서 세 차례나 표결 자체가 무산되더니 다음해인 2004년 2월 중순 4차 시도 끝에 간신히 비준안이 국회를 통과했었다. 국회비준이 지연될수록 농민보상규모는 더 증대됐다.
정부가 동의안 제출 때 당정 간 합의한 보상규모는 '시작'이었고,국회비준이 지연될수록 농업계의 요구는 증대하고 정치권은 이를 확대생산하고 정부는 결국 수용하고야 마는 상황이 연출됐다.
참여를 기치로 내거는 정부에서 목소리가 클수록 자신의 몫이 커진다는 확실한 선례를 남긴 셈이다.
그 정치드라마가 불과 1년 만에 재방송되고 있다.
지난 23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의 외교통상부 국감현장은 쌀 비준안을 상정하려는 여당과 이를 저지하려는 민주노동당 간의 육박전으로 옥신각신, 파행을 거듭하다가 의안 상정도 이뤄지지 못하고 외교통상부에 대한 국감도 이뤄지지 못하는 파국을 맞았다.
"민노당이 보좌진을 동원해 국감을 물리적으로 저지함으로써 국회의 권위와 기능을 마비시키는 최악의 선례를 남겼다.
오늘 쌀 협상 비준안 상정 무산으로 인해 앞으로 발생하는 국가적 손실과 대외신인도 추락 등 모든 책임은 민노당에 있다"는 여당과 "이번 사태의 책임은 국감 기간에 국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쌀 협상 비준안을 무리하게 강행처리하려 한 정부와 여당에 있다"는 민노당.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작년 말까지 숨가쁘게 진행된 협상 결과,한국은 쌀 의무수입물량을 2배 정도 늘려주는 조건으로 관세화 유예기간을 10년 연장받았다.
합의된 10년 후 의무수입물량은 7.96%, 협상국들이 내건 15~20%에 비해 최소한의 양보이고,관세화 유예 기간에 언제라도 관세화로 갈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하면서 관세화 전환 때 어떤 추가조건도 덧붙이지 않는다는 합의도 받아냈다.
일본이 수입물량 8%로 6년간 관세화 유예를 받은 뒤 1999년 관세화로 전환하면서 나머지 2년간 의무수입물량의 절반을 추가 개방해야 했음에 비하면 한국측에 유리한 결과이다.
정부 협상단과 함께 협상에 참가한 민간대표도 "세계무역기구와 우루과이라운드 규정에 비춰보면 협상단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다했다고 본다"고 할 만큼 2004년 쌀 협상은 최선을 다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후 10년의 유예기간의 주어졌고 대대적 농업지원이 있었지만 가격대비 쌀의 국제경쟁력은 10년 전보다 오히려 후퇴한 상황에서 또다시 관세화 유예는 정부가 주장하듯이 농민이 원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정부가 일간지 1면 광고에서 주장하듯이 쌀 농가 보전대책도 이미 마련돼 있고 협상과정에서 농업계의 건의도 대폭 수용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국감장 상임위에서 동의안을 상정하려는 정부 여당의 시도는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그렇게 제대로 한 협상이라면 무엇이 아쉬워 상정하지 못하나 하는 의혹을 국민들은 가질 수밖에 없다.
반대측이 물리적으로 논의를 저지하는 구태가 용인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한 소모적인 행태를 계속할 것인가? 통상협상은 상당히 기술적인 복잡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과정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다.
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언제까지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협상을 주도하다가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난 후에 국회에 비준안을 던지면서,제때 비준이 안 되면 국가신인도가 떨어지니 알아서 하라는 식은, 아무리 잘된 협상이라 할지라도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를 무시하는 처사이다.
통상협상 처음부터 행정부와 국회 간의 협의를 활성화시키고 제도화시켜 소모적이고 낭비적인 논란의 여지를 축소하는 등 절차적 정당성 확보를 모색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