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영준 < 준 미디어 대표 > 권위주의 정권 시절,공직자나 정치인들에게는 '3불(不) 원칙'이 있었다. '전화에다 함부로 말하지 말 것''사진 찍힐 일 하지 말 것''누가 시비를 걸더라도 참을 것'이 그것이었다. 도청(盜聽) 도촬(盜撮)과 흠집내기 시비에 휘말리지 말라는 얘기다. 당시 수사·정보기관들은 이런 불법행위로 수집된 정보를 권력층에 갖다 바쳤고,권력층은 권력 유지에 적절하게 활용했다. 기관원들 간에는 신문기자들처럼 일종의 '특종 경쟁' 바람이 불었다. 정치판에 뛰어든 어느 재벌 총수의 집무실이나 안가 밀실에는 그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보기 위해 망원렌즈 카메라가 설치돼 24시간 감시할 정도였다. 정권이 바뀌고 민주화가 됐어도 이런 관행은 고쳐지지 않았다. 오히려 국민의 눈을 피해 더욱 지능화·첨단화됐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권력자와 기관 간의 유착구조에 근본적 변화가 없는 한 이를 근절하겠다고 떠들어봐야 큰 소득은 없을 것이다. 도청 도촬 등 불법 정보수집의 원조는 선진국들이다. 미국의 FBI(연방수사국),CIA(중앙정보부),옛 소련의 KGB,영국의 MI-5,6들 말이다. 그들은 상대국 지도자,대사관은 물론 자신들의 대통령·총리까지 무차별 도청했다. 이 중에서도 '1인자'를 꼽으라면 29살 때 FBI 국장이 돼 죽을 때까지 48년간 재직한 존 에드거 후버다. 그가 8명의 대통령을 보좌하며 그토록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단 하나,그가 가진 'X파일'의 위력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역대 대통령을 비롯한 실력자들의 온갖 비리 정보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를 해임하려고 하면,후버 국장은 대통령의 여성 스캔들 관련 정보를 내놓는다. 루스벨트가 유임결정을 내리면 후버는 보답으로 대통령의 정적을 확실하게 제거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그를 애국자 반열에 올려 놓고 기린다. 워싱턴DC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에 위치한 FBI 청사의 이름이 'J 에드거 후버 빌딩'이다. 왜 그는 역사의 단죄를 받지 않는가? 왜 권력층의 치부가 담긴 'X파일'은 공개되지 않는가? 여기에는 미국인들의 신중한 실용주의적 접근 태도가 깔려 있다. 첫째,미국인들은 후버가 불법 행위를 저질렀지만 이를 훨씬 능가하는 많은 공헌을 했다고 생각한다. 둘째,만약 후버를 심판하려 든다면 그와 '도청 거래'를 한 루스벨트,트루먼,아이젠하워,케네디,존슨,닉슨 등 역대 대통령들도 모두 심판대에 올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미국의 현대사는 엉망이 돼 버린다. 셋째,'X파일'이 공개됐을 경우의 후폭풍이다. 남이 안보는 데서 행해지는 은밀한 대화나 행동이 노출될 경우 당사자는 물론 관련된 사람들의 인격적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 또한 사회 전반적 권위 추락은 물론 인간 사회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더구나 그 충격이 크면 클수록 불법 도청에 대한 유혹은 더욱 커질 것이다.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파멸시킬 수 있는 기회가 도청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로 미국은 이 문제들을 조용히,그러나 내부적으로 단호하게 처리했다. 이런 관점에서 서울지방변호사회가 검찰의 X파일 수사와 관련,"국정원의 불법도청 내용 공개를 반대한다"고 밝힌 데 대해 동의한다. 누구를 두둔하거나 잘못을 감싸자는 차원에서가 아니다. 검증되지 않은 남의 비밀이나 잘못 가능성을 '사악한' 수단을 통해 얻어낸 전리품으로 입증하겠다는 자세 자체가 위험천만하기 때문이다. 반면 국정원의 도청 행위에 대한 수사는 철저히 이뤄져야 한다. 단,소리 안 나고 현명하게 해낼 수는 없는가? 도청의 원조 미국이 자국 정보기관들의 도청 행위를 어떻게 근절하고 제도적 개혁을 이뤄냈는지부터 참고해 보라. /jmedia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