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2006.04.03 04:26
수정2006.04.09 17:33
하응백 < 문학평론가 >
독서에도 바람이 있다.
지난해 댄 브라운의 추리소설 '다빈치 코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더니 '히스토리언''늑대의 제국''단테의 모자이크 살인''성 수의 결사단''이중 설계' 등의 추리소설이 앞다퉈 출판되면서 많은 독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최근에 유행하는 추리소설을 보면 과거에 비해 다른 것이 몇 가지 눈에 띈다.
그것은 첫째 소재상의 혁신이다.
과거의 경우 주로 소설 초입에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살인 사건을 탐정이 추적해 범인을 잡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라면 최근에는 역사적 혹은 종교적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데 주력한다.
그 사건의 매개항으로는 예술 작품이 자리잡는다.
둘째는 장면 전환이 빨라 독자들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거의 주지 않는다.
독자들은 마치 영화를 보듯이 소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영상 시대의 독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작가들의 전략으로 보인다.
셋째는 영화적 통속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현 시점에서 과거의 비밀을 추적해나가는 주인공이 남자라면 그 주위엔 미모의 여성이 있고,그 여성은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이면서 한편으로 남자 주인공을 여러 측면에서 지원한다.
그들은 가끔 질펀한 정사를 나누기도 하는데,기실 이것은 사건 전개와 큰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눈요깃감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최근 출판된 '퍼플라인'은 요즘 유행하는 추리소설과는 좀 다른 특징을 가진 진기한 소설이면서 순수소설의 문학성에 육박하는 대단히 흥미로운 소설이다.
'다빈치 코드'의 아류가 아니라(이 책은 '다빈치 코드'가 나오기 훨씬 이전인 1996년에 출판됐다) 진지하면서도 추리소설의 본령을 찾아가는 이색적인 작품이다.
물론 발단은 예술 작품에서 비롯된다.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퐁텐블로화파가 그린 그림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 자매'라는 희귀한 그림이 있다.
반라의 두 여인이 욕조 속에서 야릇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한 여인이 다른 한 여인의 젖꼭지를 살포시 만지고 있고,한 여인은 반지를 쥐고 있는 기이한 그림이다.
또 자주색 장막 뒤의 액자 속에는 남자의 벌거벗은 하반신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여인 가브리엘 데스트레는 프랑스 절대왕정의 개조(開祖)인 앙리 4세의 연인으로 결혼식을 코앞에 두고 급사했다.
당시 프랑스는 신교와 구교 간의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스페인과의 전쟁,로마 교황청의 암투 등 종교적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했다.
한 여인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음모,그리고 이 사건을 그림으로 형상화한 한 화가의 거취 등이 이 소설의 중심테마인 셈인데 정통 추리소설답게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급격한 반전이 일어나고 비로소 가브리엘 데스트레의 죽음의 비밀이 밝혀진다.
더 놀라운 건 볼프람 플라이시하우어라는 한국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독일 작가의 엄청난 집념이다.
1961년생이며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그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10년간 자료 조사에 매달리고 6년 동안 집필에 몰두했다.
그는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 자매'와 유사한 그림뿐만 아니라 당시 토스카나 공국의 비밀 암호 같은 역사적 자료와 의학 자료,기행문 등을 총망라해 하나의 사실(事實) 같은 역사추리소설을 완성시킨 것이다.
또 한 명의 움베르토 에코 같은 작가의 탄생이라 아니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면 대중 추리소설도 이렇게 쓸 수 있구나 하는 감탄이 몰려온다.
프랑스 절대왕정 성립 배경이나 신구교 간의 종교전쟁,나아가 미술작품 해석에 대한 안목 같은 역사와 예술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소설을 읽는 재미와 함께 얻어지는 짭짤한 부수입이다.
가을밤에 이 소설의 여주인공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멋진 데이트를 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