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불법도청 테이프'의 진실과 내용 공개를 둘러싼 논란으로 온나라가 시끄럽다. 과거 안기부가 대통령 빼고는 다 도청했다는 것은 국가기관이 저지른 엄청난 불법이다. 그러나 이를 제쳐두고 불법 도청테이프의 내용에 매달려 이것을 조사하기 위한 특검이냐 특별법이냐로 정국이 대치양상을 띠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불법도청사건 수사에 나선 검찰은 처음 언론에 공개된 1개 테이프에 담긴 내용을 유독 문제삼고, 기업인을 시작으로 관련자들을 소환 조사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는 검찰이 일부 시민단체와 언론의 압력에 굴복해 물타기식 해결방안을 찾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로 형평성을 잃은 검찰의 포퓰리즘적 수사방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검찰의 포퓰리즘적 태도는 분명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헌적 수사이며,동시에 초법적 수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도 과거 정보기관이 불법수집한 자료에 대한 공개여부를 놓고 2년간 큰 홍역을 치른 바 있다. 결국 잘못된 역사를 밝히고 올바른 정치교육을 한다는 차원에서 이를 제한적으로 공개하는 것으로 사건을 해결한 바 있다. 당시 독일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정보보호법이었다. 이 법은 불법취득한 정보는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할 수 없으며, 이에 대한 언론보도 또한 금지하고 있다. 미국 등을 비롯한 영미법계 국가도 판례를 통해 불법도청 테이프와 녹취록은 수사 및 공개가 불가하다는 소위 독수독과이론에 근거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고 있다. 따라서 공개된 1개의 테이프에 대해서만 내용수사를 하겠다는 우리 검찰의 수사방침은 분명 법원칙을 무시한 포퓰리즘의 전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다시한번 그동안 우리 헌법이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법률이 어떻게 사생활을 보호하고 있는가 하는 점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통신비밀보호법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불법도청을 한 자는 물론, 그 내용을 공개하거나 누설한 자에 대해서도 형사처벌을 엄연히 명시하고 있다. 또 국가배상법에는 안기부의 도청내용이 공개됨으로써 사생활이라는 기본권과 명예라는 인격권을 침해받은 자는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돼 있다. 따라서 이번 불법도청 문제는 테이프에 담겨진 내용보다 오히려 불법도청한 자와 누설자, 그리고 이를 보도한 자에 대한 수사로 한정하는 것이 법리적으로 타당하다. 이미 1998년 우리 법원도 "일반 국민의 알 권리와는 무관하게 국가기관이 평소의 동향을 감시할 목적으로 개인의 정보를 비밀리에 수집한 경우에는 면책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또한 1995년에는 "일반적으로 기본권의 보호 법익은 생명권 인격권이 가장 우선한다고 보여지는 점에서 알 권리보다는 개인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야말로 더욱 보호해야 할 우선적인 가치"라고 판결한 바 있다. 또 이미 불법정치자금 문제와 관련해서는 2003년 말 수사가 이뤄져 이번 사건의 피해자에 대한 사법처리가 종료된 상황이다. 따라서 본 사건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내용은 국민들의 알 권리와는 더 이상 관계없는 사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불법도청 내용보다는 국가기관의 불법도청 실태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더 이상 국가기관에 의한 사생활 침해가 자행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초법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테이프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민단체들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칫하면 포퓰리즘의 늪으로 법치주의를 밀어넣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