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성 래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 '백범일지(白凡逸志)'를 권하는 사람이 많고,김구(金九,1876~1949)를 숭배하는 한국인도 많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읽은 '백범일지'는 그저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자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내용도 존경할 만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다른 모든 역사자료가 그럴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특히 그 책의 마지막 부분은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김구는 그가 그렇게나 기다리던 조국 해방을 맞아 상하이에서 귀국 비행기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1945년 8월15일이 지난 얼마 후의 일이다. 그는 그곳 중국 경찰에 접촉해 거기 살고 있던 조선인 안준생(安俊生,1906~1951)을 잡아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중국 관헌이 이 부탁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백범일지'의 기록이다. 바로 이 대목에는 김구 자신의 설명이 붙어 있다. "安俊生은 倭놈을 따라 本國에 도라와 倭敵 伊藤博文에게 父親 義士의 罪를 謝하고 南總督을 애비라 稱하였다." 몇 년 전 '백범일지'를 다시 읽다가 이 부분에서 나는 너무나 놀랐다. 가장 잘 정리된 '백범일지'의 주해본은 1997년 도진순 교수가 출간했는데,이 부분에 붙인 주석을 보면 안준생이 안중근의 아들이며 남 총독이란 1936~1942년 사이 조선 총독을 지낸 미나미 지로(南次郞) 임을 알 수 있다.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사의 아들이 일본인들에게 자기 아버지의 잘못을 빌고 다녔다니,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하지만 그것이 세상이고,또 역사인가? 김구가 그를 잡아 죽이고 싶어했다는 대목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백범일지' 첫 부분을 읽노라면 그가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의 사랑을 얼마나 받았던가가 잘 묘사돼 있다. 그런 관계를 잊고,왜 김구는 안중근의 아들을 잡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던 걸까? 그것도 이미 조국은 해방된 다음인데 말이다. 안준생은 그렇게 그의 미움을 살 정도로 일제 시기에 일제에 빌붙어 대단한 성공이라도 했더란 말인가? 조금 더 조사해 보니 안준생은 그 후 홍콩에서 살다가 한국전쟁 때 귀국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타고 귀국하던 덴마크 배에서 병을 얻어 선상에서 사망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그의 무덤은 부산시 초량의 금수사(金水寺) 근처에 있었다는데,몇 년 전 내가 답사해 본 결과로는 그런 무덤은 거기 없는 듯했다. 안중근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는 6살에 죽었고,안준생은 그 둘째 아들이었다. 안준생에게는 1남2녀가 있었는데,몇 년 전까지 이들은 모두 미국에 살고 있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러면서 엉뚱한 걱정이 생기기도 한다. 이들은 애국자 안중근의 손자이기 때문에 무슨 대우라도 해줘야 할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들은 매국노 안준생의 아들 딸로서 그런 대우를 받기는 어려울 듯도 하다. 그렇다고 연좌제도 사라진 오늘 그들에게 손가락질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김구는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에서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안중근 집안과 그리도 가까웠던 김구는 왜 그를 끔찍이 사랑했다는 안태훈(안중근 아버지)의 손자 안준생을 죽여 달라고 외국 경찰에 부탁까지 했던 것일까? 또 아무리 살기 어려웠어도 그렇지,어떻게 천하의 애국자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일본인들에게 자기 아버지의 잘못을 대신 빌어야 했던 것일까? 안중근 부자는 지금 지하에서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그리고 김구와 안중근은 또 무슨 대화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역사의 질곡(桎梏)이 여기에 있다. 김구는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한 듯하다. 그래서 '백범일지'는 읽기는 편하지만,전혀 무게가 없다. 사료로서는 가치가 있지만,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