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동인 < 논설위원 > 영국은 한때 전 세계에 퍼져있는 식민지 덕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다. 그랬던 나라가 열강 대열에서 밀려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가(史家)들은 세계 2차대전을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여긴다.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과도한 전쟁비용으로 나라 살림이 기울어졌다는 설명이다. 서양에선 이처럼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얻은 승리를 '피로스의 승리(Pyrrhic victory)'라 부른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소왕국인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가 로마제국과 맞서 승리했지만 워낙 피해가 컸던 탓에 오래지 않아 몰락한 데서 나온 말이다. 영국의 경제신문인 파이낸셜타임스(FT)가 소버린의 SK㈜ 지분매각을 보도하면서 SK㈜가 아닌 소버린이 '피로스의 승리'를 했다는 표현을 썼다. 소버린이 무슨 희생을 치렀는지 알수 없지만 적어도 그네들의 시각에서는 한국의 재벌,더 나아가 한국 경제를 끝까지 마음대로 요리하지 못한 아쉬움이 배어있는 듯하다. FT가 그 기사에서 "한국은 사업하기 힘든(tough) 곳이지만,그래도 매력적인(lucrative) 투자처"라고 평가한 것은 소유구조가 불안한 기업들에 대한 외국 자본의 공세가 계속될 것이란 암시로도 볼 수 있다. 이번 소버린 사태에 대한 국내 반응은 매우 다양하다. 마땅히 1768억원을 투자해 2년여만에 1조원을 챙기고도 세금 한푼 내지 않다시피한 데 대한 비난이 주조를 이룬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소버린이 우리 경제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 아니냐는 견해도 많다. 기업들이 투명경영을 하지 않거나 소유구조가 불안정할 경우 언제 위기에 처할지 모른다는 교훈을 남겨준 탓이다. 박용성 상의회장이 엊그제 "소버린에 감사해야 한다"고 한 것도 아마 그런 속내의 표현일 것이다. 실제 소버린은 기업들의 투명경영을 유도하고, 정부의 금융 외환 제도 정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과거 금융 제도가 투기자본이 쉽게 들어와 막대한 차익을 올릴 수 있도록 허술했지만 이젠 '5% 룰'이라는 적대적 M&A 방어책이 생기기도 했다. 외자에 맞설 토종사모펀드(PEF)를 키우겠다는 정책도 나왔다. 정부는 이런 것들이 국제화의 과정이라고 말하지만 소버린 같은 투기자본의 공세가 없었어도 그런 정책들이 마련됐을지는 의문이다. FT가 암시했듯 '매력적인 투자처'를 향한 외자의 공세는 더욱 거세질 것이다. 국제적인 저금리와 부동산 거품론 등으로 자산운용이 한계에 부닥친 상황에서 소유구조가 불안한 한국 기업을 놓고 벌이는 M&A 게임은 너무나도 탐스러운 먹잇감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우리 기업들엔 위기가 점점 고조되는 셈이다. 삼성그룹이 '삼성공화국'이란 비난 속에도 공정거래법의 금융계열사 의결권 축소 조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도 그런 불안감의 표출이라고 볼 수 있다. 기업들이 투명경영을 위해 노력하는 게 먼저겠지만 이젠 정부도 기업들이 투기자본의 공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기업투자 부진이 최근 경제난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지만 경영권 위협을 받고 있는 기업들에 투자 좀 하라고 권유하는 것도 솔직히 웃기는 얘기다. 기업들이 경영권 위협없이 열심히 일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바로 소버린이 우리에게 준 커다란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