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삶과 음악 영원한 테마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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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진 <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
오래 앓던 이를 빼고 치료받느라 고통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어른이 되었고 머리칼이 허예졌어도 치과란 무서운 곳이다.
들들거리는 괴상한 기계음을 내는 차가운 쇳덩어리 물체가 입에 들어가 이 뿌리까지 들먹이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지만 오래 방치한 사랑니의 횡포는 막무가내였다.
날카로운 의사의 손끝 처분만 바라보며 누워있을 때 굵은 장맛비는 참 시원스럽게도 내린다.
얼굴을 가린 푸른 수건 아래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나 깊이 후벼파고 있는지 보지도 못하고 당하는 공포는 더 생생하다.
문득 생각에 잠긴다.
이렇게 꼼짝없이 누워있는 나란 무엇인가.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얼마나 긴 인생일까.
내 인생은 어떤 음악일까.
멋진 교향곡일까.
그렇다면 지금 몇 악장쯤 와 있을까.
청중에게 아름다움을 전하는 음악가일까.
혼자 무거운 악기를 껴안고 땀흘리며 부욱부욱 활을 그어대곤 만족스런 미소로 인사를 하지만 청중들은 오히려 싸늘한 전율만 느끼는 건 아닐까.
나는 곧 초라한 철학자가 되고 경건한 구도자가 된다.
고 박성용 금호문화재단 이사장님.'영재는 키우고 문화는 가꾼다'란 말씀을 뿌리면서 척박한 우리 나라 문화의 토양을 일궈 나가셨던 분.얼마전 갑자기 타계하셨다는 소식에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빈소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조문행렬이 한결같이 누가 그를 대신할까 걱정하는 걸로 봐서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지난 주말에 49재를 끝내고 탈상재를 마쳤으니 이젠 이승의 그림자를 모두 걷어가셨을 텐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흠모하게 되는 그 분의 인생은 과연 어떤 음악이었을까.
'대기업 총수이면서 풍부한 학식과 경험,예술적인 감성,신뢰와 의리로 맺은 폭넓은 인간 관계,새로운 아이디어와 창의적인 마인드,사물을 꿰뚫는 안목,빠른 판단력과 과감한 추진력,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복잡다단하게 얽힌 일들을 일거에 해결하는 명쾌한 능력과 카리스마를 가진 뛰어난 지도력의 이 시대의 거인,소탈하고 따뜻하며 매사에 낙천적이면서 위트가 넘치고 음악과 시를 사랑하고 예술을 탐미하며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삶을 사랑했던 한국의 마지막 르네상스인'이었다고 표현한 것에 모두 공감한다.
하지만 그의 인생이 빛나는 이유를 나는 그의 인생 내내 일관된 주제인 '사랑'에서 찾고 싶다.
한마디로 그는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신 분이라는 얘기다.
예술을 흠모해서 해외출장 때에도 음악회와 전시회를 찾고,부모를 극진히 공양해서 구순 노모를 모시고 연극을 보러 가고,이웃을 사랑해서 남몰래 복지시설을 지원하고,유태인보다 훌륭한 예술가를 키워 우리 나라를 세계에 우뚝 세워야 한다며 누구보다 우리 나라를 사랑한 분.나와 내 학생들을 끔찍이 사랑해 주신 분.가르치는 일이 내 직업이고 내 학생에게 정성을 쏟는 것이 마땅한 일이건만 늘 '고맙다'고 손잡아 주고 등 두드려 주신 분.
아름다운 음악과 예술,멋진 인생의 주제는 모두 '사랑'이다.
'그를 누가 대신할까'는 '누가 대신 그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비싼 몸값을 주고 데려온 프로야구 선수를 성적이 좋지 않다고 한 시즌도 못 기다리고 퇴출시키는 마인드로는 예술 지원을 할 수가 없다.
결과를 계산하지 말고 아낌없이 사랑해 주는 것만이 진정한 예술 지원이다.
끊임없는 사랑 속에 아름다운 예술과 예술가가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내 인생 교향곡이 아직 멋진 하모니로 깊은 울림을 주는 음악이 되지 못했을지라도 나도 또한 끝없이 사랑을 실천하면서 내 인생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완성해가고 싶다.
/피아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