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규정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나선 것은 공정거래법의 관련 규정이 폐기되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외국 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M&A) 공격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할 수단이 없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또 현행 공정거래법대로 금융 계열사의 의결권 행사가 제한되면 생명과 전자를 양대 축으로 한 지배구조의 기반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도 배경이 되고 있다. 물론 삼성은 헌법소원을 제기하면서 내부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법률 검토를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승산이 충분하다는 게 삼성 법무팀의 판단이다. 우선 주주에 대한 의결권 제한은 주식회사 제도의 근간을 해치는 명백한 재산권 침해라는 것.나아가 외국인들의 적대적 M&A가 완전히 허용된 구조 속에서 특정 기업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법령 역시 헌법상 평등권에 저촉되는 '역차별 조항'이라고 보고 있다. 실제 금융감독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일본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세계 어느 나라도 금융계열사의 의결권을 제한하는 곳은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왜 역차별인가 지난 4월부터 시행되고 있는 개정 공정거래법 중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의 단계적 축소' 규정은 일반인들이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구조를 안고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산 2조원 이상의 대기업 그룹에 속하는 금융계열사들은 다른 계열사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할 때 총량 규제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 규제의 기준선이 올해는 30%이고 내년부터 5%포인트씩 낮아져 2008년에는 15%까지 떨어지도록 돼 있다. 따라서 삼성전자 지분을 갖고 있는 금융계열사인 생명(7.99%)과 화재(1.39%)는 지분에 해당하는 만큼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현재 삼성전자의 내부 지분은 이들 금융사를 포함해 △물산 4.43% △이건희 회장과 가족 3.03% 등 17.72%에 불과하다. 이 상태로 2008년을 맞이하면 금융사들은 규제 기준선인 15%를 초과하는 2.72%포인트에 대해 의결권을 상실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금융사들이 삼성전자 지분을 추가로 확보하더라도 의결권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 삼성 관계자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에 대해 아무런 의결권 제한을 가하지 않고 있는 현실과 비교하면 명백한 역차별"이라고 주장했다. ◆경영권 방어 왜 불가능한가 이론적으로 삼성전자의 경영권을 보호하려면 금융사가 아닌 다른 계열사나 이건희 회장과 같은 특수관계인들이 지분을 추가로 취득하면 된다. 하지만 현재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이 72조원에 달해 10%의 지분을 취득하는 데만도 7조2000억원의 비용이 들어간다. 현실적으로 계열사나 특수관계인들이 주식을 추가로 사들일 여력은 없다고 보는 게 맞다. 이 회장의 경우 개인재산이 많다고는 하지만 막상 재산내역을 들여다보면 전자를 비롯한 계열사 주식이 대부분이다. 두번째 방법으로 금융계열사가 갖고 있는 전자 지분을 다른 기업이나 우호세력에 넘겨 의결권을 살리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지분을 인수할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자금력을 갖고 있으면서 삼성에 우호적인 세력을 찾기는 불가능해 보인다. 결국 오는 2008년 이후 삼성전자는 내부 지분율이 15%로 묶인 상황에서 경영권 공격을 받는다면 방어할 길이 없게 된다. 이미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율은 54%를 넘어섰다. 미국 캐피털그룹(지분 9%)을 비롯한 해외 대형펀드들이 연합한다면 삼성 경영진과 충분히 표대결을 벌일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금산법 개정도 의식한 듯 삼성에 골치 아픈 문제는 공정거래법만이 아니다. 현재 정치권에서 추진 중인 '금융산업의 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개정안도 삼성의 지배구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악재다. 이 개정안은 대기업 금융사가 계열사 지분 5% 이상을 초과 보유할 경우 초과분을 팔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법이 통과되면 삼성카드는 금감위 승인 없이 보유한 에버랜드 지분(25.64%)의 대부분을 처분해야 한다. 에버랜드는 사실상 삼성의 지주회사 역할을 하고 있는 회사여서 매각이 현실화될 경우 에버랜드→생명→전자→카드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도 헝클어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삼성은 이번에 공정거래법을 헌법소원 대상으로 삼아 향후 금융산업 관련법에도 강경 대처할 수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는 관측이다. 삼성은 바로 이처럼 절박한 사정 때문에 최후의 법적수단인 헌법소원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경제계의 검찰'로 불리는 공정위와 불편한 관계가 돼 '미운 털'이 박힌다 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판단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