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을 유쾌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축복받은 재주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외모(혹은 이미지)와 유머 감각이 뒷받침 되야겠지만, 무엇보다 스스로의 언행에 대한 적당한 자신감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며 상대방도 덩달아 '업' 시킨다. 남을 즐겁게 해주는 엔터테이너가 그런 평가를 받는다면 그의 활동기간은 굵고도 길 것이라는 예측을 하게 된다. 배우 박중훈(39)이 그렇다. 나이에 걸맞지 않은 '뽀얀' 피부에 장난기 가득한 얼굴, 운동으로 다져진 다소 마른 듯 하면서도 단단한 몸매에서부터 그는 점수를 따고 들어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막힘 없는 언변. 그는 결코 거만하지도 않지만 무턱대고 겸손하지도 않다. (너무 겸손해도 때로는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법.) 그는 끊임없는 자기 관리에서 나오는 적당한 자신감으로 늘 대화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아니나다를까 이번 인터뷰에서도 자리에 앉자마자 "내 팔 근육 좀 볼래요? 만져봐도 되는데…. 어유 이것봐 근육이 춤을 추네"라며 어린아이처럼 장난을 건다. 그런데 실제로 그의 팔 근육은 장난이 아니다. 어디 팔 뿐이랴. 몸에 딱 달라붙는 '쫄티'와 청바지 차림이 무척 경쾌하게 다가오는 이 중견 배우와 유쾌한 수다를 떨었다. ▲방황하는 봉두난발 청년 이순신 "말 장난 같기도 하지만 '황산벌'은 일반적인 시각이 아닐뿐 역사적 사실을 다룬 작품이라면 '천군'은 역사적으로 서술되지 않은 부분을 가상으로 그린 영화다." 박중훈은 복도 많다. 2003년 '황산벌'에서 계백장군을 연기하더니 오는 7월 개봉하는 '천군'에서는 이순신을 맡은 것이다. 민족의 영웅 아닌가. 스스로도 "이제 남은 것은 을지문덕 뿐"이라며 농담을 할 정도. 물론 이번에는 장군이 되기 전 방황하던 청년 시절의 이순신이긴 하지만 그래도 분명 부러움을 살만한 캐릭터 복이다. "앞서 '황산벌'을 거쳤으니 적어도 이번에는 박중훈이라는 배우가 사극에 어울릴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객들이 의심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이전에 이런 류의 가상 역사극이 없었기 때문에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하다." 그는 영화에서 봉두난발 난봉꾼 이순신을 연기했다. 과거에 계속 떨어지고 의기소침해 멋대로 살자고 결심한 청년 이순신. 민족의 영웅에 대한 결례일 수도 있겠으나 영화적 상상력으로는 흥미로운 접근이다. "언젠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음식점에서 술을 마시고 나오는 장면을 TV를 통해 본 적이 있다. 당시 전두환씨는 눈이 풀려서 비틀거리는 모습이었다. 굉장히 신선했다. 그 사람에게 그런 모습이 있을 것이라고 이전까지는 생각 못했던 것 같다. 그게 바로 이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인물에게도 이면은 있다. 그것을 그린다고 사실을 왜곡하거나 희화화하는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해설이 더 그럴 듯 하다. "생각해보면 지금껏 내가 연기한 인물들은 약점을 많이 갖고 있거나 3류 인생이었다. 언제 영웅을 연기한 적이 있었나.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내게 영웅의 이면을 그리는 역할이 주어진 것 같다." ▲6개월간의 흥미진진한 촬영 그는 부산 촬영 도중 얼굴을 30바늘이나 꿰매는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 이날 만난 그의 얼굴에서는 상처는 커녕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도대체 어디를 다쳤다는 건지. "내 이럴 줄 알았어. 이거 안 보이면 어쩌지?"라며 장난스레 언성을 높인 그는 기자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제서야 콧등과 눈가, 코 주변에 옅은 상처 자국이 보였다. 흉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촘촘하게 꿰맨 덕분이었다. 이번 촬영이 남달랐던 것은 절친한 후배 김승우와의 작업 때문이기도 하다. 김승우는 박중훈을 위해 '황산벌'에 신라 병사로 카메오 출연하기도 했다. 이러한 우정 덕분에 힘든 중국 오지 촬영도 즐겁게 소화해낼 수 있었다. "승우가 작년 11월 어느날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해서 갔더니 남주 씨가 와 있더라. 그날 승우가 내게 남주씨를 소개했다. 어떤가. 잘 어울리지 않나? 둘은 잘 살 것이다." ▲썰물도 밀물도 파도를 타야된다 박중훈은 자가 진단을 명쾌하게 하는 배우다. 한때 국내 최고 배우였던 시절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음을 쿨하게 받아들인다. "내가 지금 인기의 핵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러나 그것에 실망하지는 않는다. 요새는 매사 덜 기쁘고 덜 슬프다. 기쁨 보다는 감사함이 앞서고 실망하기에는 강해졌다." 그렇다고 허술하게 보면 안된다. 그는 더 큰 시장을 내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동료 혹은 후배들과 자웅을 겨루는 단계는 지난 것이다. 대신 할리우드다. "인생의 그래프가 상승 곡선처럼 보인다고 해도 매순간 상승한 것은 아니다. 밀물이든 썰물이든 계속 파도를 넘어가며 전진한 것이다. 썰물도 파도를 타야 앞으로 가는 것 아닌가. 그 파도가 높다고 또는 낮다고 일희일비하면 망망대해로 못 나간다. 요지부동해야 한다. 눈썹도 꿈쩍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서 계속 노력하면 언젠가는 내가 목표하는 세계 시장의 큰 배우가 되지 않겠는가."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prett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