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결혼식장.


젊은 남녀가 하객의 축복 속에 식을 올리고 있고 신부의 아버지 매수드 아미르 베라니(벤 킹슬리)가 마이크를 든다.


한때 조국 이란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떵떵거리며 살던 그가 이곳 미국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어느 정도 부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추측밖에.


겉보기에는 성공한 이민자 같지만, 매수드의 실상은 판이하게 다르다.


직업은 고속도로 공사장의 막노동꾼, 고급 아파트에 사는 부유한 이민자처럼 보이지만 공사장의 작업복을 고급 정장으로 갈아입은 뒤의 얘기다.


낡아 보이지만,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집.


침대에 누워 아침을 맞는 캐시 니콜로(제니퍼 코넬리)도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는 듯하다.


바쁜 사람이지만 그래도 남편이 있고, 청소를 안해 지저분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런 대로 아늑한 집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와 모래처럼, 그녀의 삶도 위태로워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알고 보면 남편에게 버림받은 처지, 알코올 중독자에서 벗어나 힙겹게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뒤뚱거리며 삶이라는 힘겨운 길을 걷고 있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일 때문에 서로 얽히기 시작한다.


캐시는 세무당국의 실수로 집이 경매로 내 놓이는 처지에 처하고 매수드는 이 집을 싼 값에 구입한다.


캐시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유산이며 유일하게 자신이 기댈 곳인 이 집을 그것도 자신의 잘못도 없는데 빼앗길 수는 없는 일.


집을 비싼 값에 되팔 생각인 매수드도 이 집은 막내아들의 학자금이 될, 그래서 넘겨줄 수 없는 밑천이다.


'모래와 안개의 집'(29일 개봉)이 그리는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들이다.


세상은 답답하게 막혀 있을 뿐, 비극적인 결말은 삶에서 이미 예정돼 있던 듯하며 힘겹게 절망을 극복해봤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괴로움이다.


인간의 의지라는 게, 순진하게 꿈꿔보는 희망이라는 게 작은 의미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두 사람 사이의 얽힘은 경찰관 레스터(론 엘다드)의 등장으로 더 꼬여만 간다.


캐시를 돕던 그가 잘못한 것은 그녀와 사랑에 빠진 것.


부인과 자식을 버린 그는 경찰의 지위를 이용해 부당하게 매수드를 위협하며 가정과 직업이라는 그동안의 규범을 벗어던진다.


점점 복잡해지던 상황은 캐시가 총을 들고 매수드의 집으로 향하면서 극단으로 치닫는다.


안드레 듀버스 3세의 베스트셀러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나이키나 마이크로 소프트 등의 광고를 연출한 바딤 페렐만이 메가폰을 잡았다.


감독은 운명의 무게라는 이 쉽지 않은 주제에 가식없이 진중하게 접근해가며 자신의 데뷔작을 수작으로 만들었다.


부서지기 쉬운 인간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운명의 무게는 벤 킹슬리와 제니퍼 코넬리의 열연으로 더한 설득력을 띠게 됐다.


한동안 둘의 존재감을 잊고 지내던 관객에게는 이들을 다시 발견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듯.


지난해 미국에서 개봉해 인터넷 영화사이트 IMDB(www.imdb.com)의 네티즌 평점에서 7.8점(10점 만점)의 높은 점수를 받은 바 있다.


(서울=연합뉴스) 김병규 기자 bkki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