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위원회(KBO)가 야구도입 100주년을 맞아후손을 찾은 필립 질레트(Pillip Gillett)는 국내에 처음으로 각종 스포츠를 보급한 `한국 근대체육의 아버지'다. 개화무렵 숱한 선교사들이 다녀갔지만 1901년 황성YMCA 초대총무로 부임한 질레트는 길례태(吉禮泰)라는 한국이름까지 지을 만큼 한국을 사랑하며 일제에 항거했던민족주의자들을 도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질레트는 1904년 YMCA 임시회관으로 사용중이던 인사동 태화관앞에서 미국병사들의 캐치볼을 한국민들이 많은 관심을 보이자 야구를 선교수단으로 삼기 위해 용품을 미국에 주문했다. 6개월여만에 용품이 도착하자 청년회원들에게 규칙과 기술을 가르치며 처음으로야구를 보급했다. YMCA에서 시작된 야구는 이후 덕어학교(德語學敎,독일어)와 영어학교(英語學敎),일어학교(日語學敎) 등 외국어학교를 중심으로 번져나갔다. 기록에 따르면 한국에서 최초의 공식경기는 1906년3월15일 YMCA와 덕어학교가맞붙어 덕어학교가 승리했다. 1909년에는 동경유학생 야구단이 방문해 친선경기를 치른 뒤 큰 인기를 모았으며 1915년 11월 첫 공식대회인 '경성시내 중등학교야구대회'가 개최됐다. 질레트는 야구 뿐만아니라 1907년 농구도 처음 보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선교로 시간에 쫓긴 질레트는 야구만큼 농구 보급에 열정을 보이지 못했으며 농구는 1916년 YMCA 총무였던 반하트에 의해 활발하게 재보급됐다. 질레트는 스케이트화에 복싱글러브를 국내에 처음 선보인 사람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민들은 날카로운 칼날위에 서서 빙판을 질주하고, 글러브를 끼고 주먹질하는 모습을 생소하면서도 경이로운 표정으로 지켜봤다고 한다. 이처럼 질레트는 스포츠 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끼쳤지만 일제가 조작한 `105인사건'의 부당성을 주장하다 한국을 떠나게 됐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요인 암살을 기도했다며 윤치호와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등 105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 수감했다. 울분을 참지 못한 질레트는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기록한 보고서를 영국 에딘버러 국제기독교선교협의회에 발송했는데 이후 일제로부터 심각한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됐다. 결국 1913년 중국 상해에서 열린 YMCA 지도자강습회에 참석했던 질레트는 이후일본의 방해로 끝내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고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하다 1939년65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http://blog.yonhapnews.co.kr/shoeless (서울=연합뉴스) 천병혁기자 shoeles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