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星來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 여운형(呂運亨·1886~1947)의 친딸 여원구(77)는 한국정부가 그의 아버지에게 추서한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거부했다. 여운형의 자녀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그녀는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인데 지난 7일 "우리 아버지를 제멋대로 평가하면서 훈장을 주려하는 것은 당치않은 행동"이라며 그 불순한 정치적 목적을 의심한다고 했다. 일제 시기 대표적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이던 여운형을 나는 두 가지로 기억한다. 첫째 그는 1930년대 과학대중화운동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지도자였다. 둘째 해방후 북한에서 활약했던 화학공학자 여경구(呂慶九·1913~1977)가 바로 그의 조카였다는 사실이다. 1930년대 과학 운동의 대표적인 일로는 1934년 4월19일에 있었던 제1회 '과학 데이' 행사가 있다. 그날 낮에는 자동차 54대가 당시의 서울 중심부를 도는 기념 행진이 벌어졌는데, 악대가 '과학의 노래'를 연주하며 학생과 참가자들이 차를 따랐다. 밤에는 종로 YMCA회관에서 기념식을 열고 그 자리에서 여운형이 '과학자에게 고(告)하는 일언(一言)'이란 제목의 강연도 했다. 당시의 과학운동이란 본격적 민족운동이 억압된 상황 속에서 민족 지도층이 모두 적극 참가했던 '가장(假裝)된 민족운동'이었다고 나는 평가한다. 그 때 이미 '과학데이'가 있었건만, 오늘 우리는 그보다 이틀 뒤인 4월21일을 '과학의 날'이라 기념하고 있다. 1967년 4월21일 '과학기술처' 간판을 달았대서 만든 기념일이다. 당연히 1934년 이미 시작했던 '과학 데이'전통을 이어받았어야 하건만,그렇지 않은 것이 나의 오래된 불만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그와 관련해 떠오르는 그의 조카 여경구는 내게는 수수께끼이다. 그는 1940년 어느 날 여운형이 일본 천황을 만나러 갔을 때 그의 일본어 통역 노릇을 했다. 그런 그는 1936년 일본 와세다대학 응용화학과를 졸업하고 해방과 함께 바로 월북했다. 여원구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6촌 오빠는 자기 아버지 여운형의 권고로 1946년 3월 이미 월북했다. 그는 몇차례 서울로 돌아와 북측이 필요로 하는 과학기술자들의 월북을 권유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이승기(李升基·1905~1996)도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학박사 이승기는 1939년 일본 경도제대에서 학위를 받았다. 여경구는 염화비닐 전공,이승기는 비날론 전문이어서 아주 비슷한 분야였다. 두 사람은 1950년대 말 각각 크게 성공해 북한의 대표적 과학자로 꼽히기도 했다. 두 달 전에 나온 '한국 근대과학 형성과정 자료'(문만용·김영식 지음)를 보면 해방 당시 얼마나 많은 과학기술자가 남쪽을 버리고 월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충 보면 해방전 일본에 가서 공부한 대학 졸업 수학 전공자는 모두 15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8명이 월북했다. 물리학을 공부한 일본 대학 출신자는 10명인데 그 가운데 6명이 월북했고,화학과 화학공학 분야에서는 모두 50명의 명단이 파악됐는데 그 가운데 14명이 북쪽에서 활동했다. 대개 서울로 왔던 과학자들이 해방과 한국전쟁 사이에 북으로 향했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서울대 역사학 교수였던 김성칠(金聖七·1913~1951)의 '역사 앞에서'를 읽어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한 사학자의 6·25일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일기에서 그는 한국전쟁 끝무리에 계속 월북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하필 왜 내 친구들은 모두 다 빨갱이가 돼버리는 것일까"란 기록을 남기고 있다(1950년 9월19일).1주일 뒤 26일에는 "자꾸만 없어지는 문화인과 기술자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장면도 기록되고 있다. 당시 9·28 서울 수복 이틀 전 일기다. 분명 1960년대까지 북쪽은 과학기술에서도 남쪽을 압도하고 있었다. 약 40년 사이에 세상은 다시 바뀌어 이제 남쪽의 과학기술 수준이 북을 앞선 것으로 보인다. 원자력이나 미사일 분야는 모르지만.그러나 그 많은 "월북 과학기술자들의 그 후"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알기가 어렵다. 여운형의 조카 과학자 여경구를 포함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