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반도체 제조회사 A사는 당국으로부터 회사 기밀을 해외에 유출하려던 직원을 붙잡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처음엔 영문을 몰랐던 이 회사는 내막을 알고난 뒤 충격과 경악에 휩싸였다. 제품개발본부 실험기술팀의 엔지니어 한 사람이 빼낸 첨단기술 프로그램이 무려 3백30건에 달했던 것.5백12메가 등 반도체 웨이퍼 검사장비를 운용하는 데 사용되는 이 기술자료의 가치는 조(兆)단위를 간단히 넘겼다. 국내 첨단기술을 해외로 빼돌리는 산업스파이들이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다. 첨단기술을 개발하는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나고 기술력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면서 경쟁사의 핵심기밀을 유출하려는 시도 또한 빈번해지고 있는 것이다. 2일 국가정보원과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정원에 적발된 산업스파이 건수는 총 26건에 피해예상금액은 무려 32조9천억원에 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적발 1건당 1조2천6백억원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전기 전자 정보통신 등 IT(정보기술)분야의 최강국을 지향하는 국내 산업이 기밀 유출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산업스파이 적발 건수는 지난 2003년까지 매년 10건 이하에 불과했으나 반도체 LCD 휴대폰 등의 분야에서 국내 기업들의 제품력과 기술력이 세계 선두권으로 치고올라가면서 지난해부터 폭증하기 시작했다. 국정원 관계자는 "지난해 산업보안 전담인력을 2배로 늘리는 등 산업스파이 색출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산업 전반에 확산되고 있는 기밀유출 시도를 모두 차단할 수는 없는 형편"이라며 "도중에 적발되지 않고 해외로 빠져나간 기술까지 감안하면 연간 수십조원의 국부가 새고 있다고 봐야 한다"고 경각심을 일깨웠다. 특히 지금까지 당국에 검거된 총 66건의 기밀유출사건 중 60.6%에 해당하는 40건이 전직 직원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드러나 기업들의 퇴직자 관리에 심각한 허점이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국정보통신수출진흥센터(ICA)가 지난해 조사한 'IT기술 해외유출 실태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기술유출을 시도하는 이들의 69.4%가 퇴직 사원이었던 것. 이같은 양상은 지난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연구인력들이 신분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 데다 해외 경쟁업체들이 파격적인 연봉과 근무조건을 제시하고 있는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