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학부 중심의 미국식 종합 사립대학으로 만들겠다는 로버트 러플린 총장의 개혁 구상이 좌초될 위기를 맞고 있다. KAIST는 24일 서울 메리어트호텔에서 열린 정기 이사회에 최대 현안인 대학 개혁안을 상정하지 못했다. 이처럼 KAIST 개혁작업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은 내부의 강력한 반발로 인한 것이다. 러플린 총장의 개혁안에 반발하며 지난해 12월 초 보직 사퇴한 박오옥 기획처장(51)은 지난 13일 KAIST 교수들에게 '총장께 드리는 마지막 고언'이라는 '사퇴의 변'을 보낸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박 전 처장은 e메일을 통해 "KAIST를 세계적 연구중심 대학으로 만들겠다던 약속을 벌써 잊었느냐"면서 "세계적 연구중심대학 중에 학부 중심인 곳이 있는지 묻고 싶다"고 주장했다. 러플린 총장이 '과학기술계의 히딩크'로 묘사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그는 "선진 축구를 배우고자 어렵게 초빙했는데 그가 보여준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면서 "(학교를 사립 종합대학화하겠다는) 작금의 상황은 축구는 한물간 경기이니 미국에서 잘나가는 미식축구를 하라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지난 연말 예산 확보를 위해 총력을 기울였는데 러플린 총장이 방해해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고 주장했다. KAIST는 지난해 말 기숙사 건립 등과 관련, 2백억원의 예산 증액을 신청했으나 무산됐다. 그는 "러플린 총장 영입 이후 벌어진 갖가지 마찰과 최근 사립대학화 논란 등으로 마음고생이 컸다"며 "그가 별 대안 없이 현재와 같이 학교를 흔들려면 차라리 미국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고 강조했다. 박 전 처장은 전임 홍창선 총장(현 열린우리당 의원) 시절부터 기획처장을 맡았고 지난해 러플린 총장을 영입하는 데도 한몫 했었다. 이같은 반발에 대해 러플린 총장은 이날 이사회를 끝낸 뒤 "교수들이 개혁안을 논의 중인 것을 감안해 당초 1월말로 잡았던 개혁구상 종합 발표 시점을 미루기로 했다"며 "그러나 교수들의 주장이 시장논리에 배치되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장학금으로 학생들을 키운다면 어떻게 최고 대학으로 만들 수 있겠느냐"며 "앞으로도 시장논리에 바탕을 두고 타임 스케줄에 따라 대학육성 방안을 내놓겠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개혁 방향을 둘러싸고 양측이 팽팽하게 맞섬에 따라 KAIST가 개혁안을 제대로 마련할 수 있을지 불투명해지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일부에서는 "러플린 개혁안이 물건너간 게 아니냐"며 우려하고 있다. 오춘호·장원락 기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