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전쟁 중의 일이다. 백제에 빼앗긴 합천 대야성을 탈환하러 간 김유신은 옥문곡에서 적장 8명을 생포한다. 그리곤 백제 측에 편지를 보낸다. 내용인즉 6년 전,백제가 대야성을 칠 때 전사한 성주 내외의 유골을 자신에게 포로로 붙잡힌 백제 장수 8명과 맞바꾸자는 거였다. 의자왕은 기꺼이 수락한다. 오래 전에 죽은 신라사람의 뼈를 땅에 묻어두어야 아무 소용이 없는데 산 장수 8명과 바꾸자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죽은 사람의 뼈와 산 장수를 바꾼 언뜻 이해하기 힘든 거래 직후에 백제는 그만 참패하고 만다. 백제와의 싸움에서 늘 열세였던 신라가 승기를 잡은 것은 그 때부터다. 신라군의 사기가 돌연 하늘을 찔렀기 때문이다. 당태종 이세민이 요동정벌을 꾀하면서 겉으로 내세운 명분 가운데 하나도 수나라 때 전사자의 유골을 거둬가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전쟁에 대비해 민심을 하나로 아우르고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고도의 책략이다. 근년엔 북한과 협상 끝에 미국도 자국민의 유해를 찾아갔고 경우는 다르지만 얼마 전엔 일본도 그랬다. 역사를 살펴보면 성공한 나라들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백성의 생명을 정부가 정말 귀하게 여긴다는 점이다. 산 사람은 고사하고 죽은 이의 유골까지 잊지 않고 반드시 되찾아 가는 정부,그런 국가를 백성은 목숨을 바쳐 지키고 섬긴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내 자손들은 철저히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신뢰가 있을 때 국민은 뜨겁게 뭉치고 국운은 자연히 융성하게 마련이다. 우리나라는 과연 어떤가? 지난번 동남아 지진해일의 피해수습과 대처과정을 지켜보면 숨이 절로 막힌다. 해당 공관의 늑장대처와 무성의를 질타하는 비난과 원성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연말에는 외교부 직원들이 음악회를 열고 송년파티를 벌였다는 보도도 있었다. 내 나라 국민이 불의의 재앙 앞에서 맨손으로 폐허를 뒤지며 가족들의 시신을 찾고 있는데 한편에서 흥청망청 파티나 여는 공무원이 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는 용서할 수 없는 배임이며 심각한 범죄행위다. 비단 이 경우뿐 아니라 해외에서 우리 국민이 재난을 당했을 때 역대 재외공관이 해온 행태를 보면 정말이지 세금이 아깝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죽은 이의 유골은커녕 자국민 보호와 생사확인조차 못하는 공관과 공무원이 왜 있어야 한단 말인가? 재해나 사고는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미국엔 '엠버 경보 시스템'이란 게 있다. 18세 이하의 미성년자 납치사건이 발생하면 전국의 매스컴,각 도로의 전자표지판을 통해 그 사실을 알리는 시스템이다. 1996년 텍사스에서 납치됐다가 무참히 살해당한 소녀 '엠버 해거먼' 사건 이후 희생자의 이름을 따서 생긴 제도다. 경찰이 용의자를 체포할 때 미리 일러주는 '미란다 원칙' 역시 1963년 미란다 사건 이후에 생긴 관례다. 그런 선진사회의 시스템이나 관례 속엔 두 번 다시 같은 불행을 겪지 말자는 사회적인 약속과 합의가 녹아있다. 소를 잃었으면 우선은 잃은 소부터 찾아야 한다. 그런 다음엔 반드시 외양간을 고쳐야 한다. 시스템이 없으면 만들고 본분을 망각하거나 책임을 다 못한 공직자가 있다면 가차없이 처벌하는 엄격한 행정적·제도적 관례를 정착시켜 나가는 것도 외양간을 고치는 일이다. 공직사회의 각성과 혁신을 거듭 촉구한다. 그것 없이는 미래도 없고 희망도 없다. 재난과 사고로 울부짖는 국민 앞에서 태연히 파티 스케줄이나 짜는 정신나간 정부 말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정부,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지구 끝까지 뒤져서 유골이라도 찾아오는 정부를 우리도 이제쯤은 가져보고 싶다. 김정산 소설가/대하소설 '삼한지' 작가